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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흉터와 악수 - <유령>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8화
한국 영화의 휘청거리는 새 중심 잡기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를 때' 의미가 있다. (2023.01.27)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영화 <유령>의 반전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게 <유령>의 인상은 영화의 운명이 종종 이름을 따라간다는 낭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영화가 지닌 퀴어 요소가 비가시화되는 방식, 같은 영화가 전혀 다른 형상으로 보이고 들리는 것 모두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은 의미에서) 유령적이다. 한 격렬한 온라인 리뷰에 따르면 이 영화는 페미니즘과 PC주의, GL과 BL 등이 무려 한꺼번에 버무려진 작품으로, 바로 그 점이 영화의 중심을 잃게 하고 관객을 질색하게 한다고 했다. 한편, 분명한 반향을 얻고 있는 또 다른 반응은 액션 첩보물의 클리셰를 깨고 인물 재현의 범주를 넓힌 이 영화가 주는 쾌감과 반가움을 고백하고 있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도대체 그 유령은 누구시길래.
<유령>의 유령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냥 여자들일 뿐이다. 독립운동을 한 여자, 무술에 뛰어난 여자, 영화를 좋아하는 여자, 여자를 사랑한 여자,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에 전염된 여자들이 이 영화에서 각자의 액션을 수행한다. 말해보고 싶은 것은 그 중 유독 사소한 두 장면의 세부이다.
'유령'이라 불리는 스파이를 잡아 항일 조직 흑색단을 제거하려는 조선 총독부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조선 총독부에 근무하는 5명의 용의자를 외딴 호텔에 불러들인다. 영문을 모른 채 응접실에 초대받은 이들이 단 한 명의 진범을 가려내기까지 얽히고 설킨다는 설정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밀실 추리를 연상시키나, 사실 <유령>은 장르의 정통성을 처음부터 무너뜨리고 시작하는 영화다. 스파이가 누구인지 관객에게 일찌감치 발설해버리기 때문이다. <유령>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박차경(이하늬)은 흑색단의 연인 난영(이솜)에게 총독 암살 지령을 전한 후, 그가 끝내 임무에 실패해 눈 앞에서 죽는 모습까지 목격한다. 관객은 이미 차경이 비탄에 잠긴 유령임을 알고 있다. 추리의 효용이 소거된 무대 위에 지어진 호텔은 그렇담 왜 필요한가. 박차경과 한 방을 배정받은 또 다른 인물, 정무총감의 비서 유리코(박소담)가 곧 우리 앞에 미궁의 실타래를 한 가닥 떨어뜨린다. 황금기 할리우드의 스타 마를렌 디트리히같이 차려입은 유리코는 정무총감의 권력을 곧 자기 것인양 착각하고 날뛰는 젊은 여자다. 차경과 유리코가 나란히 있을 때, 둘을 뒤덮은 무채색과 원색의 극단적 대조는 이들이 곧 절묘한 한 쌍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노골적인 신호로 보인다.
결정적 장면 하나. 피와 땀으로 얼룩진 두 여자가 호텔의 외딴방에서 잠시 은신 중이다. 차경은 막 유리코 역시 유령이며, 그가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아득해진다. 이마저 함정은 아닐지 의심스러워지는 찰나에 유리코는 증언 대신 드레스 자락을 걷어 허벅지를 내민다. 항일 운동 중 수없이 포로로 붙잡혀 생사를 오갔던 유령의 허벅지엔 고문과 전투의 흔적이 정렬되어 있다. 이 장면에서 급작스럽게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이 동원되었단 사실이 흥미롭다. 카메라는, 상처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울퉁불퉁한 유리코 몸의 문양을 마치 박찬욱 영화의 벽지인 양 화면 가득 잡는다. 새살과 죽은살이 뒤섞여 우그러진 피부를 가진 유령이라니. 비가시적 숙명을 공유한 이들이 서로의 가시성을 인정하는 순간은 이렇게 언어가 아니라 신체의 감각으로 새겨진다. 이어 프레임 안을 침범한 차경의 떨리는 손이 흉터를 쓰다듬는다. 몸과 몸이 뒹구는 스펙터클한 액션신 못지 않게, 어쩌면 그보다 더욱 '접촉적'이다. 유령이라는 이름을 빌려 기대기 좋은 환상성을 밀쳐내자 내밀한 살과 흉터, 그것을 만지는 손과 몸이 화면의 주인으로 떠오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유리코는 유령에서 인간으로 부활한다.
"그동안 아무도 물어봐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참 고맙네. 내 이름은 안강옥이야."
장면 둘. 큰 부상을 입은 채로 호텔을 간신히 빠져나온 두 여자가 숲속 외딴 산장에 또 한번 은신한다. 차경이 쓰러진 강옥을 돌보고, 깨어난 강옥이 아직 피 흘리는 차경을 돕는다. 언제나 '다치는 쪽은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라고 믿는 수녀 또한 홀연히 나타나 두 개의 수녀복을 건넨다. 영화 의상이 캐릭터의 일면이라면 둘은 이제 낯선 타자가 아니라 동일시할 수 있는 서로로 거듭난다. 그것을 연대라 불러봐도 좋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또 한번의 클로즈업 숏이 각인된다. 경성으로 떠나기 직전, 붕대로 각자의 상처를 칭칭 동여맨 두 손이 악수하는 찰나의 장면. 관능적인 스킨십과는 거리가 멀고 부유하듯 흩어지는 유령적 몸짓은 더더욱 아니다. 화면 양쪽에서 다가온 두 개의 다른 손이 굳게 맞잡을 때 화면은 악력으로 진동한다. 아주 잠시. 붕대의 천과 천이 삐걱대고 버석거리며 마찰음을 낸다.
쌍둥이 수녀의 악수를 기점으로 <유령>은 관객과의 약속도 달리 한다. 밀실 추리극의 새장을 홀연히 떠나버린 영화는 액션 느와르로, 경성 버전의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재빠르게 활강한다. 흉터를 쓰다듬고 서로 손을 맞잡는 조용한 몸짓이 일으킨 파동 혹은 나비 효과. 내가 찾은 변화의 당위는 그러했다. 이 일련의 절제된 접촉과 그 진동을 <유령>이 지닌 액션 영화로서의 총기라고 불러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팽팽한 두 축의 제도적 권력이자 전형적인 남성적 라이벌 관계인 두 인물 —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쥰지(설경구)와 카이토 — 이 거칠게 맞붙는 후반부의 액션 신은 그 대척점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과 정념에 찬 두 주체가 광기의 주먹다짐을 이어가는, 한 사람이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뜨겁게 악다구니를 써야만 완성되는 화려한 스펙터클이 그들의 것이다.
나는 왜 하필 흉터 쓰다듬기 악수에 얽힌, 각각 단 한 숏 정도에 그치는 너무도 작은 액션을 곱씹게 된 것일까. 이들 장면의 존재 자체가, 처절한 인정 투쟁으로 무장한 한국 영화의 고루한 액션 클라이맥스에 제동을 거는 것처럼 보여서라고, 뒤늦게 깨닫는다. 이해영 감독은 여성과 여성 혹은 퀴어 커플의 관계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 몸과 몸의 친밀함을 <유령>에서 '스타일'로 빚어둔다.
낯설게 바라보고 찬반에 부쳐야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따라' 독립 투사가 된 여성의 존재 자체로 남겨두어선 안된다. 여성 혹은 소수자가 남성 중심적 전통을 지닌 장르를 지배할 때 생기는 작고 희미한 균열들, 새로운 리듬과 이미지들이 논의의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질 수 있길 바란다. 한국 영화의 휘청거리는 새 중심 잡기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를 때'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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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