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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의 짧은 소설] 시간 뜨개질

<월간 채널예스> 202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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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 겨울 내내 이 행복한 기억으로 옷을 지을 테고 원은 그걸 입고 따뜻하겠지, 그리고 원이 따뜻하면 나도 따뜻할 것이다. 따뜻함은 옮아가니까, 사랑이 그렇듯이. (2023.01.06)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와 거실을 한 바퀴 휘돌았다. 앗 추워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잠옷 바람인 어깨를 감싸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의 잎을 떨어뜨린 아파트 아래 가로수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르고 맑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연한 늦가을 아침, 코앞으로 다가온 겨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날이었다. 나는 그대로 창가에 턱을 괸 채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뜨개실 가게에 가기 좋은 날이었다.

가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새삼 생각했다. 

보자, 그러니까 뜨개질을 시작한 지 벌써 오 년이 되었구나.

그 동안 참으로 많은 것들을 떴다. 처음으로 떴던 것은 누구나 그렇듯이 목도리였는데, 새하얗고 예쁜 실을 아낌없이 사용했으나 완성된 것은 폭닥한 걸레짝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을 선물하자 나의 애인 원은 뛸 듯이 기뻐했고, 몇 년 뒤 스키장에서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매년 겨울 꼬박꼬박 목에 둘러 주었었다. 그 다음으로 뜬 것은 작은 곰 인형. 처음 잡아 본 코바늘로 뜬 것이었고 눈을 이상한 곳에 달아 조금 기괴한 모양새였지만 이 녀석은 아직도 원의 백팩에 대롱대롱 달려 있다. 그 다음은 갑자기 브이넥 조끼다. 목이며 소매 둘레 고무단이 축 늘어져 사 입는 것만은 못한 옷이 되었지만, 어쨌든 대강 보기엔 꽤나 그럴듯한 것이 만들어졌다. 기왕 뜬 것 그대로 셔츠에 받쳐 입혀 일요일 성당 미사에 함께 갔었는데, 원에겐 다른 단정한 옷이 별로 없었으므로 이 조끼는 그대로 매주 미사 때마다 입는 옷이 되었다. 사람 옷을 한 번 뜬 뒤로는 완전히 재미가 붙었다고나 할까, 스웨터를 여러 벌이나 뜬 것은 물론 숄이니 쿠션이니 손뜨개 하는 사람들은 다 한 번씩 떠 보는 그런 것들을 매년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꼭 뜨게 되었다.

뜨개실 가게에 가는 지금도 역시나 스웨터를 한 벌 뜨려고 벼르는 중이었다. 이미 예쁜 도안을 찾아 둔 것은 물론이었다. 계절에 어울리는 눈꽃 무늬, 피부가 까만 원에겐 어두운 색깔이 어울리니 검정이나 남색이 좋겠지. 사이즈는 잴 필요도 없다. 원의 몸에 딱 맞는 사이즈며 게이지를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거기에 소매는 넓게, 밑단은 길게, 목은 넉넉하게. 그렇게만 떠 주면 예쁜데 편하기까지 하다며 좋아하고 자주 입어 줄 것이 틀림없다. 예쁜데 편하기까지 하다, 니터(Knitter)에겐 최고의 칭찬이 아닐 수 없다. 뭐, 입는 사람의 성격이 단순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러고 보니 뜨개를 시작한 지 오 년째라면 원과도 벌써 오 년째 만나고 있는 셈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평생을 두고 생각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살아온 시간을 비례해 생각하면 꽤나 긴 시간이다. 참, 마침 원과 처음 만난 것도 이런 늦가을이었지. 무던하고 순하지만 언제 보아도 귀여운 나의 애인, 원을 생각하며 나는 망연히 버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이 풍경과 나무들과 늦가을의 냄새, 뜨개실의 포근함과 하나의 옷을 다 짓고 난 뒤의 뿌듯함, 그리고 그것을 입어주는 사람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나를 낯익은 정류장에 내려놓았다. 뜨개실 가게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한참 들어간 곳에 있었다. 나는 손에 든 가방을 달랑거리며 익숙한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작년에는 원과 함께 왔었고 재작년에는 엄마와 왔었다. 원래 니터들은 각자 선호하는 뜨개실 가게가 있어 한 곳에서만 실을 잣는 게 일반적이지만 재작년엔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무튼 무슨 일 때문에 엄마가 다니는 가게가 문을 닫았었고, 그 덕분에 진귀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엄마가 실을 잣는 모습을. 내 뜨개질 선생님이기도 한 엄마는 옷은 물론 커튼이나 카펫 같은 대작도 수십 개를 만들어낸 뜨개질의 고수였고 그런 만큼 실 잣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었다. 뜨개실 가게 아주머니가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자세와 몸짓으로 한 타래를 한번에 휘리릭, 그건 거의 예술의 경지였지. 

그날 엄마가 자아낸 실은 아빠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 엄마는 오로지 아빠에 대한 기억으로만 실을 자았으니까. 그렇게까지 다정한 잉꼬부부였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함께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인가 아무리 뽑아내고 뽑아내도 엄마의 손끝에서 시작된 실은 작은 베개만한 타래를 지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엄마가 떠올린 기억은 아빠와의 신혼여행 때였다고 했다. 요새야 해외로 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두 사람이 결혼할 당시엔 무조건 온양 온천 아니면 부곡 하와이였고, 아예 신혼여행을 생략하는 사람들도 많을 때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것도 삼박 사일이나 머물렀다나. 형편이 넉넉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연애 시절, 엄마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 친구가 부럽다며 한 마디 했던 것을 기억한 아빠가 그날부터 차곡차곡 돈을 모아 몇 년 뒤에 진짜로 엄마를 제주도에 데려간 거였다. 평소 무뚝뚝하고 무드 없기론 유명했던 사람에겐 별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야 뭐 아이구 징그러워 하고 웃어넘겼던 이야기지만, 엄마에겐 그 기억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실을 잣는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날 엄마가 자아낸 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가게에 찾아온 손님 모두가 경탄하며 그 장면을 지켜봤을 만큼. 엄마는 그 실로 겨울 내내 여러 가지 무늬의 모티브를 떴고, 그걸 이어 담요를 만들었다. 그리곤 이듬해 봄에 함께 아빠의 묘에 찾아가 그걸로 묘석 위를 덮어주었다. 아직 봄바람이 차다느니 하는 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나도 한번 쓰다듬어 본 그 담요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덮으면 저절로 잠이 솔솔 올 것 같은, 평화롭고 예쁜 꿈을 내내 꾸면서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담요였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것을 뜰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뜨개실 가게 앞에 도착했다. 가게는 열려 있었다. 슬쩍 안을 살펴보니 마침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주인 아주머니만이 뭔가를 열심히 뜨고 있었다. 문을 열자 딸랑, 가게 문에 달린 방울 소리에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알아본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아이고,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이에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네다섯 평짜리 가게 안에는 훈김이 가득했다. 가운데에 새빨갛게 달궈진 석유난로 때문이겠지. 난로 옆으로는 귤이 반쯤 들어있는 상자가 놓였고 양쪽 벽으로는 딱 맞게 짜여진 선반에 색색의 실타래가 빼곡하게 가득했다. 거기에 아마도 주인 아주머니의 솜씨일, 다양한 뜨개 작품들이 군데군데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가방부터 옷, 담요는 물론 누가 입을지 모르겠지만 수영복이며 웨딩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까지 있었고 한쪽엔 화려한 색깔과 모양의 수세미들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주렁주렁 걸린 진열대도 보였다. 작년에 왔을 때와 똑같네, 둘러보며 나는 미소지었다. 

"작년에 자아간 실은 벌써 다 썼어요?"

아주머니가 난로 위에 끓던 주전자를 머그잔에 부으며 물었다. 구수한 현미녹차 냄새가 확 퍼졌다.

"그럼요, 그거 탑다운 스웨터 만들었는데 일 미터도 안 남기고 딱 맞더라고요."

"어머, 다행이네." 

아주머니가 머그잔을 내밀었다. 한 모금 호록 마시자 밖에서 묻어온 추위가 사르르 녹아 사라지며 속이 따뜻해졌다.

"오늘은 뭐 사려고? 실 잣게?"

"네, 이제 겨울이니 또 시작해야죠."

"그래요. 그럼 잠시만."

아주머니가 실 자아낼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머그잔을 쥐고 그 모습을 구경했다. 준비라고 해 봐야 가게 한 켠에 놓인 실 잣는 기계를 가게 가운데로 가져와 가볍게 먼지를 터는 것뿐이지만. 버튼이 몇 개 붙은 커다란 나무판 위에 뾰족한 막대가 달린 단순하게 생긴 기계였다. 요즘엔 신형도 많이 나왔다지만 이 가게는 아직까지도 초기의 구형 모델을 사용하고 있었고 나는 이게 좋았다. 군데군데 고친 부분이 있는, 오색의 실밥들이 틈새마다 끼어 있는 오래된 기계. 수많은 사람들의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 묻어 있는 좋은 기계였다. 

"자, 대충 준비는 됐어요."

"네."

나는 머그컵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아주머니가 빈 실패를 가져와 기계에 달린 막대 위에 꽂아 주었다.

"보자, 실은 얼마만큼 필요해요?"

"스웨터 한 벌 뜰 정도면 되니까, 커다랗게 한 볼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그럼 시작할게요."

아주머니가 기계에 달린 다이얼을 달그락달그락 돌려 맞췄다. 나는 기계 앞에 섰다. 실을 자아내는 건 항상 떨리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어떤 실이 나올까. 물론 재료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올 여름, 원이와 청평에 놀러 갔을 때의 기억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때 본 밤하늘이 정말 아름다웠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그으며 서로 아는 별자리를 짚어줬었지. 모기향이 타는 매캐한 냄새를 맡으면서. 

분명 좋은 실이 될 거야.

나는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고르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주머니가 꽂아준 빈 실패를 쥐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손을 떼자, 손끝에서 진한 남색의 실이 사르르 빠져나와 실패에 한 바퀴 감겼다.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곁에 서서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격려했다. 좋아, 이번엔 느낌이 좋은데. 호흡을 유지하며나는 눈을 감았다. 그대로 계속 생각을 떠올렸다. 그날의 일들을.

각자의 일을 마치고 저녁에 만나 출발했었고 도착하니 밤이었다. 고즈넉한 펜션에선 밤의 숲 속에서만 맡을 수 있는 눅눅하고 푸른 향이 가득했다. 가방을 대강 던져놓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뛰어나와 고개를 뒤로 꺾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정말로 셀 수 없을 만큼 가득했다. 와, 원래 밤하늘이란 이렇구나. 평소에 우리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머리 위에 이고 사는구나. 서로 감탄하곤 한참 말을 잃은 채 하늘만 보았다. 선명히 빛나는 북극성, 커다란 십자가 모양의 백조자리며 꼬리를 도사린 전갈자리도 있었다. 저기 봐, 저게 전갈의 몸통이고 꼬리래. 우리는 서로의 귀에 속삭이며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내내 별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다른 호실에서 피운 듯 모기향 냄새가 섞여 들어왔고 발치 근처 풀숲에선 풀벌레 한 마리가 기운차게 울었다. 행복해. 원이 문득 중얼거렸다. 삶의 갈피마다 가끔 이런 시간이 있다면,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원의 목덜미엔 기분 좋게 열이 올라 있었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여름밤...

"어머, 너무 예쁘다."

아주머니가 감탄했다. 눈을 뜨고 실패를 보니 정말 그랬다. 벌써 반쯤 감긴 실패에는 그날의 밤하늘을 닮은 남색의 부드러운 실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중간중간 흰색과 노란색으로 점점이 섞여든 별빛과 살짝 휘감겨 더해진 회색과 연두색, 저건 모기향과 풀벌레일까. 나는 미소지었다. 이 실은 좋은 스웨터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올 겨울 내내 이 행복한 기억으로 옷을 지을 테고 원은 그걸 입고 따뜻하겠지, 그리고 원이 따뜻하면 나도 따뜻할 것이다. 따뜻함은 옮아가니까, 사랑이 그렇듯이.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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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유리(소설가)

소설가. 식물과 고양이를 사랑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한 소설을 쓴다. 문학 플랫폼 <던전>의 운영진으로 활동했고 『괴담』, 『인어의 걸음마』에 표제작을 수록하는 등 여러 SF 앤솔러지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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