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식물탐색] 봉화숲해설가협회와 함께하는 숲 체험
허태임의 식물탐색 4화
블로그 대문에 신영복 선생님의 산문집 『더불어숲』에 등장하는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2022.12.20)
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
경북 봉화의 숲해설가협회에서는 매달 '숲아카데미'라는 걸 연다. 10년 가까이 다양한 분야의 강사를 초청해서 이루어지는 강좌다. 올해 마지막 수업으로 허 선생이 강의를 한 번 더 해줄 수 있겠냐고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난가을에 강의를 들으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12월 둘째 주 어느 저녁에 나는 두 번째로 그분들을 만나러 갔다.
이 강좌의 청강생 대부분이 나의 부모님처럼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다. 그분들 중에는 이상을 선생님이 계신다. 백두대간수목원에 와서 내가 처음 기획한 연구 프로젝트가 봉화군의 자생 식물을 밝히는 거였다. 군 면적의 80% 이상이 산지인 경북 봉화에는 자그마치 45개의 산이 있다. 그 산을 해마다 15개씩 3년간 조사했다. 봉화군의 예산을 지원받아 연구 보조원을 채용하게 되었는데, 그때 산림 공무원으로 일했던 이상을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봉화의 산길을 훤히 꿰뚫고 있었고, 봉화의 마을과 골짜기 곳곳에 깃든 오래된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평소처럼 식물 앞에서도 한결같이 겸손한 분이어서 정말 본받고 싶은 어른 중 한 분이다.
나는 봉화에서 저절로 자라는 식물 중에 지역 농가에서 키우면 도움이 될만한 수종을 선별해서 제안했다. 그중에 실제로 대규모 재배가 가능한 대표 종을 선정해서 씨앗과 재배 기술을 지역민들에게 알렸다. 그분들이 직접 심어 기른 식물들로 해마다 여름과 가을에 수목원은 '봉화 자생꽃 축제'를 열게 되었다. 산이 깊은 만큼 골짜기마다 약재가 되는 식물이 내 눈에 많이 보였다. 약용 식물 재배 농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백작약과 참당귀와 천남성과 같은 식물들을 찾아서 꼼꼼하게 기록했고, 그들을 묶어 봉화에서 자생하는 약용식물 100종에 대한 목록집을 발간했다. 그러한 약용 식물 중에는 먼 과거부터 너무 오랜 시간 채취되다 보니 자연에서는 멸종의 위기에 처한 경우도 있기에, 별도의 보호가 필요한 종들을 따로 골라 『백두대간 봉화군의 보호식물』이라는 책을 엮기도 했다.
그렇게 지난 몇 년간 봉화의 산들을 헤매며 만난 식물 이야기가 그날의 강의 주제였다. 수업을 듣던 몇몇 선생님들께서는 그 산들 따라 이어지는 어디어디 길이 좋다며 낙동강 굽이길과 외씨버선길과 금강송숲길 등 봉화의 멋진 길 자랑을 아낌없이 했다.
나는 또 이 무렵 관찰하기 좋은 식물의 겨울눈에 대한 이야기를 어르신들 앞에 펼쳐드렸다. 어떤 선생님께서 오늘 숲해설 수업에서 겨울눈 단면을 잘라서 관찰했다며 히어리 꽃눈이 벌써 이렇게 꽉 찼다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수업 후에 협회의 올해를 결산하는 정기 총회가 곧장 이어졌다. 이상을 선생님이 따뜻한 차 한잔 먹고 가야 한다며 나를 붙잡는 바람에 뜻밖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마치 송년회에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회의는 올해 좋았던 점과 개선할 점 등을 기탄없이 말하면서 진행이 되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두터운지 가늠이 되었다. 봉화숲해설가협회는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인데 지역의 숲과 나무 조사를, 숲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봉사 활동을 계획하고 꾸준히 이어가겠다고 여러 명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와중에 허 선생의 강의를 정기적으로 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순간 내 머리 위로는 내년에 해야 할 업무들과 써야 할 원고들과 만나야 할 식물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 순간이 어물쩍 넘어가기만을 바랐다.
그러자 한 선생님께서 내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키며 그게 '와이로'라고 흐뭇하게 웃는 게 아닌가.
멀뚱멀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이상을 선생님의 대변인으로 나선 한 선생님께서 '와이로'는 뇌물을 뜻하는 일본어로 알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검지를 들어 공중에 한자 '와이로(蛙利鷺)'를 또박또박 적으며 설명한다. 꾀꼬리와 까치가 누가 노래를 더 잘하는지 결정해달라고 백로를 심판으로 세웠는데 노래 실력보다는 백로가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준 까치의 편을 들었다는 것. 와이로가 어느 나라 말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내 앞에 놓인 차는 확실히 나에게 미리 건네는 뇌물, 즉 '와이로'라는 것이었다. 여러 선생님들이 맞다고 어린아이들처럼 손뼉을 치며 너나없이 해사하게 웃는 게 아닌가. 내 앞에 놓인 산국 차에 든 마른 꽃이 한겨울에 맑고 깨끗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의 수업 자료를 공유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봉화숲해설가협회 블로그에 접속했다. 십 년 전 그대로 변함없이 운영되는 블로그라니, 신기하면서도 재밌었다. 한편으로는 지켜줘서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다. 블로그 대문에 신영복 선생님의 산문집 『더불어숲』에 등장하는 유명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경상도의 깊은 산골짜기 봉화의 숲이, 산이, 자연이 특히 아름다운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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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사랑하는 다정한 마음과 제대로 지키려는 절박함으로, 집요하게 추적하고 꼼꼼히 들여다본 풀의 기록(草錄), 나무의 기록(木錄) “우리가 무엇을 나누어야 한다면 부디 이 책처럼만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_박준(시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저자) - 박상진(경북대 명예교수), 고규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