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전통문화에 새로운 기억을 잇다
『할머니의 이불장』 양선하 작가 인터뷰
사라져 가는 전통 문화를 『할머니의 이불장』 안에 담아 내면서 작가가 기대한 바를 들어보았다. (2022.12.12)
한때 집집마다 자리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사라지는 물건들이 있다. 나전 기법, 즉 광채가 나는 자개 조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넣거나 붙여서 만든 이불장도 그중 하나다. 양선하 작가는 직접 본 이불장을 포함, 최근에도 사용되고 있는 전국 곳곳의 이불장과 자개 문갑을 여러 경로로 수집해 '누구나 한 번쯤 본 적 있는 것 같은' 이불장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오래된 시간만큼이나 첩첩 쌓인 이불들이 가득하다. 사라져 가는 전통 문화를 『할머니의 이불장』 안에 담아 내면서 작가가 기대한 바를 들어보았다.
그림책 『할머니의 이불장』은 대학교 시절 그렸던 그림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어릴 적 외가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만 계신데 압도적인 이불장 속에 첩첩이 무늬가 화려한 이불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의아하고 또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낯설지만 이색적인 매력을 지닌 이불장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할머니의 이불장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오래된 이불이 쌓인 모습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의 시간이 담긴 것이라는 의미를 두고 작업을 했습니다. 이때는 100호 크기의 장지에 먹선을 뜨고 호분을 올린 다음 진채로 여러 번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오래전 그린 한 장의 그림이 세월을 건너 한 권의 그림책이 되었습니다. 그림책으로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이불장이란 안방에 자리하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서 할머니의 취향, 가족의 시간을 가득히 담고 있는 소재이지요. 동시에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생활상과 정서를 시각화할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되어 그림책으로 풀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할머니와 아이들의 연결, 이불이라는 제재가 주는 따뜻한 느낌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향을 고민했습니다. 이불장 안에 차곡차곡 쌓인 옛 기억이, 낡고 오래되어 쓸모없을 것 같은 가치가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쓸모와 의미, 새로운 기억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니의 이불장』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이불장』에 등장하는 자개 이불장을 보고 "나도 이런 이불장을 본 적 있다", "어릴 적 할머니 집에 있었다"라는 독자 반응이 많습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특별히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요?
구매자들이 선호했던 자개장과 이불의 무늬와 구성이 있고, 그 이미지를 골라 이 책에서 재현했기 때문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한때 크게 유행했던 자개장의 무늬와 형태, 이불, 베개들을 존재감 있게 구현해내면, 독자들이 자신의 기억과 연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 고증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석, 박사 과정을 통해 동양미술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자료에서 형태만 차용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시각적 재현을 위해서는 미술사적인 자료 수집해 당시 유행 또는 전형이라 할 만한 이미지를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개인과 국공립, 대학박물관에서 소장, 전시 중인 유물을 직접 보고 도록과 연구 자료를 수집한 결과를 밑바탕에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할머니의 이불장』은 이불장 속에 들어 있는 다양한 이불들을 통해 감각 놀이, 상상 놀이를 즐기는 그림책입니다. 전체 장면 중 이불의 비중이 훨씬 크지만, 도입부의 자개 이불장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합니다. 표지용으로 이불장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그림을 받았는데, 디자인 과정에서 이불장보다 이불이 더 강조되었어요. 아쉽지는 않으셨나요?
이불장 손잡이를 당길 때처럼 그림책 표지를 여는 동작이 충만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자개장의 이미지를 더 비중 있게 싣고 싶었습니다. 망설임과 두려움을 이기고 이불장 문을 여는 그 순간을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경험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자개장의 공작새 무늬와 이불의 봉황 무늬와 연결시키고, 가운데 빨간 장미는 할머니께서 애용하시던 커다란 장미꽃 털 담요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이불장과 그림책 표지는 물성이 다르고, 이불장 문을 연 다음부터는 그 안에 있던 이불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지금의 표지가 좀 더 친절하게 상상을 유발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근에는 그림책 창작에 있어 디지털 작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이불장』은 모든 장면을 손으로 작업한 작품인데요. 주로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원화 작업만의 매력이나 장점이 궁금합니다.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대상과 재료, 제작 방법과 태도 등의 일치가 그 작품의 의도와 감흥을 보는 이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전장이나 침선장과 같은 장인들의 경지에 감히 제가 범접하지는 못하지만, 공예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고단한 손맛을 이 작업에서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할머니의 수고스럽고 정성스러운 손길이 가족을 꾸려온 원동력이라 생각하였고, 그것이 아이들에게 정서적인 끈처럼 이어지길 바라는 저의 바람을 전달하기에도 손으로 작업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모든 장면은 수채화용 종이에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동양화 모필을 사용하여 투명 수채 물감으로 채색하였으며, 자개장의 묘사에서는 수채과슈도 활용하였습니다. 형광이 섞인 연두와 분홍, 파랑을 활용해 이불의 강렬한 색감과 현란한 이불의 무늬를 표현했습니다.
이불이 나오는 그림책이라 자기 전에 함께 읽는 '잠자리 그림책'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반응들이 들려옵니다. 독자들이 '이 책의 이 부분을 신경 써서 봐 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을까요?
이불마다 다른 무늬, 질감, 부피감 등을 시각적으로도 표현했지만, 오감으로 상상하여 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단어들을 골라 사용하였습니다. '꾸깃꾸깃', '촘촘히', '꼼질꼼질'. '보시시', '고부랑고부랑', '홍알홍알' 등과 같은 표현을 소리내 읽다 보면 이야기와 밀착되고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잠이 들 때 불안감을 느끼는 어린이들도 이불 놀이를 통해 이불의 촉감, 소리 등의 긍정적인 경험을 하여 밤에는 애착하는 이불을 끌어안고 유쾌한 기분으로 잠들었으면 합니다. 이불의 포근함과 이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며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른 독자들도 이 책에 담긴 따뜻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할머니의 이불장』은 쓰고 그린 첫 번째 그림책입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상을 관찰하면서 얻는 재미, 여행이나 탐험 또는 놀이에 몰입하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솔직하게 그려 내고 싶습니다. 이야기와 잘 어우러지는 기법으로 좀 더 다양한 재료와 표현법을 사용해 작업해 볼 생각입니다. 어떤 현상의 역사성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을 즐기기 때문에 이후의 작업은 미술사학을 전공한 장점도 살려보고 싶습니다. 한국 미술사와 일상을 연결한 주제나, 역사적인 장면이나 인물에 대한 픽션 그림책 작업에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일했던 경험을 기초로 박물관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그림책 작업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양선하(글·그림) 이화여자대학교 미술학부에서 한국화를, 동 대학 인문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동양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 연구원, 한국고고미술연구소의 간사로 일했습니다. 한겨울에 태어나서 푹신하고 보드라운 이불을 좋아합니다. 포근한 솜이불 속에서 곰실곰실 이야기를 생각하고 그림들을 떠올리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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