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희 "'힘내라'는 말처럼 아픈 말은 없었어요"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니』 고태희 저자 인터뷰
자신의 우울증 분투기를 섬세한 언어에 담아 내놓은 고태희 작가를 만나보았다. (2022.12.12)
질병 서사가 목소리를 내는 시대지만 여전히 우울증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차갑다. 몸의 병과 다르게 마음의 병은 그저 의지의 문제로 치부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손쉽게 "힘내", "긍정적으로 생각해", "너보다 더 힘든 사람을 생각해" 등의 말을 건넨다.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니』는 우울증을 그저 '힘을 내면 해결되는' 상황으로 여기는 시선을 문제시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병의 고통 외에 그 시선의 무력감까지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우울증 분투기를 섬세한 언어에 담아 내놓은 고태희 작가를 만나보았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울증에 걸린 작가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약해빠졌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어요. 특히,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아"라는 말에는 "그것도 못 견뎌?"라는 송곳 같은 말이 함축되어 있는 느낌이었죠.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저의 의지보다는 아버지의 바람이 컸어요. 본인이 못 이룬 꿈을 저를 통해 이루고 싶어 하셨거든요. 전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타인의 시선에 좌지우지되며 살아왔어요. 무언가를 이루어내면 기분이 좋아서 성취와 성장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살았죠. 그런데 그 기분은 너무나도 쉽게 휘발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어요. 이제 와 깨달았는데 그건 제 행복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족시켰다는 안도감이었어요.
다른 사람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만연한 것 같습니다. 특히, '그 다른 사람'이 부모일 때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죠.
우울증, 정확히는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를 앓게 되면서 저를 많이 돌아보고 관련 책도 많이 읽었어요. 대체 제 우울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거든요. 1차적으로는 저를 가스라이팅한 직장 상사가 원인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누적되어온 부모님의 영향이 컸어요.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공부 잘하고 근심을 사지 않는 맏딸로 커야 했거든요. 이때부터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강박적인 성격이 생겼어요. 결국, 저는 타인에 의해 조종당하고 마음이 무너진 것인데, 이게 과연 백프로 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닌 것 같아요. 스스로를 지킬 행복에 대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성찰 때문이지 우울증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충돌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인용하면서 가까운 이들조차 끝내 병에 대해 질려 할 수 있음을 말하는 부분이나,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에게 우울증을 커밍아웃하는 부분이 그랬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두려워해요. 내 병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까? 침울하고 어두운 내 기분을 계속해서 드러낼 때 사람들이 질려하지 않을까? 이 사회는 침울한 분위기를 허락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을 지키고 싶어 해요. 기분이 물들어 하루를 망치게 될까 봐 우울증 환자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꺼리죠. 저는 매일 세상에서 밀려났다는 낙오감과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어요. 그러면서도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글을 맺으면서 작가님 스스로도 "힘을 내야겠다"라고 말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힘내라"는 말이 저를 더욱 아프고 외롭게 하고, 마치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모두 꾀병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지만 결국 저도 그 말을 사용하는 모순을 보였죠. 오랫동안 이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긍정적이고 힘차게 사는 것만이 좋은 삶의 태도라는 주입을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알아요. 힘을 빼고 살아도 내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초라한 마음을 안고 살아도 괜찮아요. 그 삶 자체로 괜찮은 삶이에요. 많은 이들이 우울한 감정을 숨기고 가면을 쓰고 살아요. 그 가면을 벗는 것에서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남편 분이 한 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태어났으니 사는 거야. 잘 살려고 하지 마. 그럼 힘들어서 못살아"라며 작가님을 위로했는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떠셨나요?
머리를 맞은 거 같았어요. 늘 조금이라도 잘 살기 위해서 애쓰고 아등바등해왔는데, 잘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니 모든 불안과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죠. 저도 모르게 하루하루에도 순위를 매겨온 게 아닌가 싶어요. 대학에 순위를 매기고, 직장에 순위를 매기는 것처럼 얼마나 알차게 보낸 하루인지 평가하는 거죠. '오늘은 참 뿌듯하다', '오늘은 하루를 허비했어' 하고 말이죠. 인생 전체를 볼 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에요.
책에 실으려다 저작권 문제로 싣지 못한 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엇이었나요?
에린 핸슨의 '아닌 것'이라는 시예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되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었어요. 일부를 소개해볼게요.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나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 웃음 속의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우울증이 찾아오고 나서는 서울대 박사, 포스코 연구원, 착한 딸... 저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그저 학력 높은 경력 단절자, 숨어서 몰래 자해를 하고 자살 시도를 하는 불효자식일 뿐이었죠. 결국, 우울증은 남의 시선으로 쌓아 올린 성을 모두 없애고 나만의 행복으로 다시 성을 쌓으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사회에서 입은 옷, 직급... 그건 모두 제가 아니었던 거죠. 마흔이 넘었지만, 이제 저의 성을 차곡차곡 쌓는 중이에요. 지난 일은 덮어두고 제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고 있어요. 이 책은 그 발걸음을 위한 초석인 셈이에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이 터부시되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해요. 누구나 자신의 우울을 드러내고 우울 사용법에 대해 알고 있을 때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힘이 없다면 힘을 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자신의 세계를 돌아보고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고태희 부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인하대학교 공대에 진학한 뒤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졸업 후 포스코 기술 연구원에 들어가 회사 생활을 하다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스타트업으로 이직한다. 이 선택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 그땐 몰랐다. 상사의 가스라이팅으로 공황 장애가 왔고, 얼마 뒤 조울증 판정을 받고 회사를 그만둔다. 이 책은 그 후 우울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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