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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조금 덜 비겁한 사람이 된다는 것 - <아마겟돈 타임>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4화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면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조금이라도 덜 비겁한 사람의 자세를 고민하고 과거를 기억하려 한다. 그것은 때로 세상의 저열함 앞에서 의기소침해진 이들이 혼자 영화관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소한, 어둠 속에서라도 부끄러워하기 위함이다. (2022.12.02)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감정에도 강자의 것과 약자의 것이 있을까. 세상은 그렇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이 만든 의심의 상태, 반기를 들거나 머뭇거리는 태도, 과거를 잊지 않는 자세는 경쟁 사회에서 저평가된다. 강자 동일시를 택한 사람들이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다. 양심에도 계급을 나눌 필요는 없겠지만, 모두가 정의의 투사가 될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부끄러워할 줄은 아는 재능이 인간에겐 필요하다. 1980년 뉴욕 퀸스, 백인 중산층 가정의 소년 폴에게도 이런 시험이 찾아든다. 그에겐 다행히 할아버지로부터 대물림된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의 유전자가 있다. 공상, 추상, 우주를 좋아하는 소년은 곧잘 "(학습 속도가) 느리다"는 말을 듣지만, 그는 지극히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6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과 단짝 죠니는 생애 처음 대마초 한 개비를 피우다 발각된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저소득층 출신의 흑인 소년이 자기 아들과 어울리지 않게 하고 싶은 백인 중산층 부모는 폴을 명문 사립 학교로 전학 보낸다. 작은 비겁함을 딛고 진입한 세계에서 폴은 더 공고한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접하게 되고, 폴과 죠니의 우정에도 실금이 간다.
<아마겟돈 타임>의 폴은 평생 배관공으로 일한 아버지와 부유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폴의 조부모는 반유대주의를 이기고 살아남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레이건을 반대하고 핵전쟁을 두려워하는 이들 가족은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믿지만, 영화는 계급 이동의 사다리에서 탈락하고 싶지 않은 가족의 모순적 욕구가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스스럼없이 발화되는 광경 또한 숨기지 않는다. 그런고로 폴은 공립 학교에서는 자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립 학교에서 자신을 줄 세우기해 본다. 배관공인 아버지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의 학비를 할아버지가 대신 지불하고 있으며, 자신은 사립 학교의 나머지 일원들과 한참 다른 처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폴 곁에서 늘 웃고 있었던 죠니가 일찌감치 품고 있었던 여러 슬픔 중 하나다. 폴은 이제야 겨우 그 중 하나를 미약하게 깨닫는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구호가 있다. 하나는 "돌아보지 말라(Don't Look Back)"다. 폴과 죠니는 학교 컴퓨터를 전당포에 팔려다 경찰서에 구금되는데, 언젠가 폴의 아버지가 담당 경찰관의 배관을 무료로 고쳐주었던 우연(을 빙자한 백인 중산층 가정에 대한 사회적 포용)에 힘입어 폴 혼자 풀려난다. 부자가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어떤 절묘한 행운에 압도당한 얼굴로 아버지가 폴에게 가르친다. 절묘한 불공평 역시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라고. 착잡하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한편 두 번째 구호는 정반대다. 폴의 정신적 지주인 할아버지는 어느 날 밤, 폴의 침실에 들어와 "과거를 기억하라(Remember the Past)"고 당부한다. 할아버지는 20세기 초 유대인 탄압을 피해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야만 했던 자기 어머니(폴의 증조 할머니)의 역사를 들려준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 카메라는 이윽고 아직 비탄의 감정을 온전히 자각하지 못해 당혹으로 얼룩진 소년의 커다란 눈으로 진입한다. "잘 자렴" 인사를 건네고 문을 닫는 엄마는 마치 깊은 어둠 속으로 영영 떠나버리는 것만 같고, 학살과 차별의 아픔을 실은 단어들은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빌려 방안을 둥둥 떠다닌다. 잊어선 안 될 기억이 후대로 전수되는 순간을, 동화같이 채색된 유년이 끝나가는 순간을 이토록 생명력 있게 감각적 차원에서 묘사하는 영화는 드물다. 폴은 이제 돌아보지 말라는 말과 과거를 기억하라는 말 사이의 카오스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그토록 원하던 우주가 폴 앞에 당도했다. 그 무렵 소년은 처음으로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통해 예술적 각성과 허영도 취하게 된다. 할아버지를 잃고 상실과 애도 또한 배운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아마겟돈 타임>이 그리는 유년의 끝이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 중 「미카엘라」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다수의 선한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세상을 망친다고 아빠는 말했었다. 아빠의 말은 맞았지만 그녀는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승패가 뻔한 링 위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세상이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자신을 소외시키고 변형시켜서라도 맞춰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부딪쳐 싸우기보다는 편입되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초대받고 싶었다." _p.256
바로 이런 '부끄러움'이, 트럼프 시대를 거친 2022년에 1980년의 유년을 회고하는 영화가 등장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폴이 다니는 사립 학교에서 당시 검사였던 트럼프의 동생이 연사로 나서 학생들의 성공을 독려하는 장면까지 구태여 보여준다. 강자들의 긍정 언어 속에서 드디어 우리는 오늘의 악화된 세상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아마겟돈 타임>은 나지막이 읊조린다. 폴에겐 유년의 끝이지만, 제임스 그레이 감독에겐 그곳이 시작점이었던 셈이다. 그레이는 "어떤 상상도 취재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내 기억에 근거한 영화를 만들었다(<인디와이어>)" 라고 말한다. 요컨대 이 영화가 저지르는 부끄러움과 실수들은, 그것이 상징적 과거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억이기에 더더욱 불가역적으로 느껴진다. <아마겟돈 타임>은 그래서 몹시 쓸쓸하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주로 폴을 향해 다가가곤 했던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가 오히려 물러나기를 택한다. 그 사이 소년은 자신의 비겁함을 깨달았고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다만, 모른 체 하지는 않기로 한 것 같다. 어느 오후, 희미한 초라함과 미약함을 느끼며 한 아이가 혼자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이때 카메라가 비추는 텅 빈 학교, 텅 빈 집의 풍경은 그 세계의 허약한 기만을 잠시나마 발설한다. 앞으로 폴은 최은영의 표현대로 승패가 뻔한 링 위에서 계속 편입되고 초대받을 테지만, 적어도 뒤돌아 볼 줄 아는 정도의 어른은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아버지의 소망 —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 — 을 실천한다.
경찰서 장면 이후로 이 영화에 죠니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겟돈 타임>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폴 시점의 영화이다. 부지불식간에 누린 특권과 뒤늦은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수많은 문학과 영화 서사가 언제나 나보다 조금 더 불행한 타자를 비교 대상으로 두고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것 자체로 '기억하는 나'는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런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면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조금이라도 덜 비겁한 사람의 자세를 고민하고 과거를 기억하려 한다. 그것은 때로 세상의 저열함 앞에서 의기소침해진 이들이 혼자 영화관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소한, 어둠 속에서라도 부끄러워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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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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