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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비비(BIBI)의 어떤 복수
비비(BIBI) 'Lowlife Princess : Noir'
비비(BIBI)의 <Lowlife Princess : Noir>앨범 패키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뮤직비디오 스토리보드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2022.11.30)
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
비비(BIBI)의 <Lowlife Princess : Noir>앨범 패키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뮤직비디오 스토리보드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포토북 역시 뮤직비디오 스틸컷 중심으로 꾸며졌다. 앨범 발매 전 이미 세 편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며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뮤직비디오와의 유기성을 높이 두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면무도회'의 뮤직비디오는 일견 난폭함 그 자체를 목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흰 드레스를 입은 비비가 일본도를 휘둘러 배우들을 학살하고 피를 뒤집어쓰는 모습에서 적잖은 이가 타란티노를 연상하기도 했다. 타란티노는 그에게 '허용'되는 무제한인 듯한 폭력과 악취미 그 자체로 영화광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구석도 있다. '타란티노급 수위'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기보다는 곧잘 '못하니까 해본다'는 로망의 실현에 그치기도 하는 이유다. 더구나 <킬 빌>은 케이팝에서도 종종 패러디 혹은 오마주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눈길을 끄는 것은 도입부에서 복수의 계기로 제시되는 장면이다.
앨범과 함께 공개된 '나쁜X'에서 더이상의 의심은 필요없다. 뮤직비디오는 '가면무도회'가 영어 제목 'Animal Farm'이나 특수 분장을 한 배우들의 정장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던 것보다 서사적으로 더 친절하다. 권력과 부패가 작품의 '세계관'이다. '그땐 보게 되는 거야 / 나쁜X'을 씹어뱉는 대목은 그야말로 한국식 조폭 느와르 속 악인의 말투를 가사와 억양, 발성으로 구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비에게는 앨범을 (케이팝적으로) 구성하는 레퍼런스로서 하나의 취향과 '세계관'을 '채택'하는 기색이 없다. 말하자면 '90도 인사하는 아티스트지만 이번에는 이런 콘셉트입니다'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작품의 외연에 그치기에는 너무나 본격적으로 조직화돼 '콘셉트'에 그치지 않는 '콘셉트'를 보고 있다.
비비는 여러 편의 뮤직비디오 속에서 상당한 고난을 겪는다. 매우 가학적이고도 변태적인 방법으로 구속되거나, 사방에서 칼끝이 겨누어지거나, 얼굴과 온몸에 피칠갑을 한다. 핏물을 비처럼 맞으며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감전 사고의 위험이 있는 장면도 있다. 알약 무더기를 시리얼처럼 말아 먹거나 목이 졸리기도 한다. 물론, 팔다리가 잘리거나 생매장 당하는 배우들도 있기는 하지만 상식인이라면 그런 것으로 비비를 위안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개중 신체적으로 가장 안전한 것이 '불륜'인데, 착취 당하는 사랑을 고전적인 순진함으로 노래한 끝에, 청중이 환호하자 가수가 당황하다가 이내 기쁘게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 연작 속 비비의 가혹한 처지는 그와 이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어렵다. 특히 여성, 또는 여성 아티스트로서 말이다. 이 앨범의 험하고 끔찍하며 더러운 콘셉트는 험하고 끔찍하며 더러운 세계와 이를 향한 복수를 담는 그릇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이 앨범이 케이팝 씬과 갖는 연관성이다. 콘셉트와 뮤직비디오의 유기성, 엽서와 포토 카드가 포함된 패키징 등은 케이팝의 강점으로 거론되는 특징이다. 국문과 영문 곡 제목이 번역을 넘어 현저히 다른 말을 하면서 부차적인 의미를 발생시키는 점도 케이팝스럽다. ('가면무도회'의 영어 제목은 'Animal Farm', '불륜'은 'Sweet Sorrow of Mother', '나쁜X'은 'BIBI Vengeance'다) '콘셉트'를 선명하고 친절하게 보여주며 쌍점으로 부제를 붙인 앨범 제목도 최근 케이팝의 트렌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제목의 '공주'는 서브컬처에서 '히로인'과 거의 동일하게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케이팝이 여성 아티스트를 바라보는 시선의 기초값인 동시에 차마 전면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스태프나 팬을 향한 감사를 손글씨로 적어내는 'Thanks to' 페이지에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을 말하며, 사실상 작품 의도에 가까운 글을 남긴 것도 이색적이다. 때로 본격 케이팝 아티스트 같고, 때로 케이팝을 패러디하는 작품 같기도 한 이유다.
비비는 케이팝이라는 환경에서 비롯된 방법론을 채택하거나 변용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으나 케이팝에서 허용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일렉트로닉 음악에서는 댄스 플로어용이 아닌 '감상용 일렉트로닉'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비비의 케이팝은, 선량하고 '인성 올바른' 아티스트들이 지상파 TV에서 들려주는 안전하고 기분 좋은 음악이 아닌, '대안적'인 케이팝, 얼트(Alt)-케이팝이라 할 만하다. 부분적으로 이는 아티스트 자신이 '범-케이팝' 세계에 속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겠다. 또한, 앨범이 말하는 고난과 복수가 범-케이팝 세계와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해석의 여지를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관되고도 강경한 콘셉트로 꽉 짜여져 있으면서도 다양하고도 불온한 맥락을 드리우는 앨범이다. 올해 가장 용감하고 치열하며 매서운 작품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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