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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완의 다음으로 가는 마음] 책과 나
제 5화. 책과 나
지금은 전처럼 세상에 있는 좋은 책을 모두 읽어버리고 싶다는 헛된 욕망에 끌려 다니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좋은 책들이 아직 못 읽힌 채로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2022.11.29)
<채널예스>에서 격주 화요일 영화감독 박지완의 '다음으로 가는 마음'을 연재합니다. |
나는 책 선물은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책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미 손에 들어온 다음이라면 어떻게 해야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길까? 애초에 책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며,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지나치게 반영되어 상대에게 강요하는 느낌은 아닌지 늘 다른 물건을 주는 것보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독서란 정말이지 개인적인 경험이다.(그래도 내가 정말 주고 싶다면 준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읽는 행위도 포함되지만, 읽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책을 구매하는 것, 그리고 글씨나 그림이 인쇄된 종이를 묶어 놓은 그 물건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포함한다.
나는 셋 다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처음 독립해서는 처음으로 내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에서인지 책을 이전보다 더 많이 샀다.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다가 다음 집으로 이사하면서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작은 원룸에 무슨 책이 이렇게 많냐고 했을 때 알게 되었다.
이사 갈 동네를 고를 때에도 근처에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는지도 제법 중요한 요소로 고려한다. 지금 내 손에 없는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면 당장 보고 싶어 안달하는 편인데 근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우가 가장 빨리 그 책을 구하는 길이다.
왜 그리 책이 필요한가.
나는 딱히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 나를 매료시키는 것에 잘 홀린다.
어릴 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에 재미난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뭐든 다 읽겠다는 욕망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책을 사기도 많이 사지만 도서관에서 항상 대출 한도의 최대 권수를 빌려왔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빌려온 책 중 앞 쪽을 보다가 말고 반납한 경우도 많았다. 좋아하는 일이라 오래 계속해서인지, 아니면 내 취향이 분명해져서인지 요즘은 빌려온 책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워하며 읽다가 반납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연말에 한해 읽었던 책의 목록을 적어본다. 이 목록을 적어보면서 대부분이 소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추리 소설이 많은데 이건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완결된 이야기, 잘 만들어진 세계는 나에게 늘 안정감을 준다.
특히, 독서가 진행되는 방식이 늘 책 속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내가 읽기 시작하면 그 완결된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책을 덮으면 그 세계가 멈춘다. 언제든 다시 그 페이지를 펴서 읽기 시작하면 그 세계는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특히 청소년기의 나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책으로 도망쳤고 혼자이고 싶지 않지만 혼자일 때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펼쳤다.
어릴 때는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 또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그 끝으로 질주하듯이 책을 읽었다. 그때의 쾌감이 너무 커서 다른 즐거움들은 조금 무시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나의 호기심과 성질 급함을 해소해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책은 나를 자기 방식으로 길들였다.
영화나 드라마를 스킵해서 보는 일은 정말 싫어한다. 정말 부득이하게 볼 때도 있는데 매번 후회한다.
내가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할 때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보았다는 것이다. 이해했든 아니든 좋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써 있는 것을 읽기는 했어야 한다. 그 책을 읽은 시간이 나에게는 그 책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컨텐츠를 보는 일 역시 나에게는 독서와 비슷한 과정이다.
내가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서 그렇겠지만, 독서는 나의 일상적인 태도까지 만들어버렸다.
나는 버스를 타기도 하지만 지하철 타는 것을 좋아한다. 버스에서 책을 보는 건 어렵지만 지하철은 책을 읽기 좋은 장소다. 책을 읽다가 잠드는 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들고 다니기 어려운 두꺼운 책을 그때 읽는다. 누군가 약속에 늦어도 책이 있으면 기다리는 일도 제법 괜찮다.
첫 영화를 개봉한 직후 미뤄왔던 그 동안의 불안과 걱정이 밀려왔다. 코로나 한 가운데여서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남는 시간에 읽는 게 아니라 독서대를 사서 궁금했던 주제를 정하고 두 달 정도 하루 일과의 중심을 책 읽는 일로 정했다. 목표로 정한 책들을 다 읽겠다는 생각으로 현재 나의 불안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부터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성실하게 읽었다. 그 내용이 다 기억난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떤 것은 오래 남지만 대부분은 그냥 흘러 지나간다. 그러나 또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는 행운도 있겠지.
넓지 않은 공간에 책을 두는 일이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남편은 함께 살게 된 이후 꽤 큰 책장이 늘 가득 차 있다 못해 종종 바닥에 쌓일 때마다 정말 이 책들이 다 필요하냐고 물었다. 주기적으로 도서관에 없는 책은 기증하기도 하고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기도 하지만 내 기준에서 필요한 책들은 늘어가고 책장의 공간은 한계가 있다.
읽지 않은 책은 당연히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다 읽고 재미있는 책은 언제 다시 읽고 싶을지 모르니까 책장에 있어야했다. 처음엔 남편은 이북리더기를 구입하라고 권유했지만 나의 고리타분함을 받아들였는지 요즘은 그냥 오는 책 택배를 잘 받아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책을 두 번 읽지는 않았다. 조바심. 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읽은 책을 또 읽을까.
두 번 읽은 책은 손에 꼽는다. 좋은 책은 바로 두번째 읽을 때 더 재미가 있다는데, 첫 독서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발견할 수 있다는데, 나는 아직 그렇게는 못 했다. 이제 여유가 생기면 전에 읽어서 좋았던 책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어떤 책들은 기억과 전혀 다른 이야기 일수도 있을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의 내가 읽은 텍스트와 지금의 내가 읽는 텍스트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번엔 책이, 독서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쓰려고 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내가 얼마나 고리타분한 사람인가 고백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나의 책 장바구니는 가득 차 있고 매달 두 권의 희망도서를 도서관 앱에서 신청한다.
지금은 전처럼 세상에 있는 좋은 책을 모두 읽어버리고 싶다는 헛된 욕망에 끌려 다니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좋은 책들이 아직 못 읽힌 채로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어떤 세계가 나를 위해 기다려준다는 든든한 생각.
아,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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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화 <여고생이다>, 장편 영화 <내가 죽던 날>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