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식물탐색] 식물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초록(草錄)의 일
허태임의 식물탐색 2화
"수목원의 사계절은 봄, 여름, 평가, 겨울 아니던가요." 한 해 평가회 보고 자료 만드는 일에 열중인 동료들끼리 주고받은 일종의 위로의 말이다. (2022.11.22)
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
"수목원의 사계절은 봄, 여름, 평가, 겨울 아니던가요."
한 해 평가회 보고 자료 만드는 일에 열중인 동료들끼리 주고받은 일종의 위로의 말이다. 올해의 연구사업 결과와 내년도 계획을 상부에 보고하고 평가받기 위한 그 일에 온 정신을 쏟다 보면 가을은 온데간데 없고 이내 겨울의 초입에 선다. 나의 경우 올해는 특히 더 그렇다.
정부가 '공공기관 혁신가이드라인'을 공표하며 공공기관 구조 조정 바람이 불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산하 기관이다. 수목원과 정원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으니 이를 도맡을 곳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2017년 정부는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라는 새로운 공공기관을 만들었다. 정부세종청사 옆에 있는 국립세종수목원, 대관령의 국립한국자생식물원, 개원을 앞둔 전남 담양의 한국정원문화원과 전북 김제의 국립새만금수목원도 여기에 속한다.
우리나라 공공기관은 모두 350개 정도 된다. 이 많은 공공기관의 인력과 예산을 정부가 손보겠다고 한다. 금년 대비 예산의 80% 선에서 내년 사업을 계획하여 올해 결과와 함께 보고하라는 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왔다. 수목원의 사업 전체를 전반적으로 평가해서 예산을 얼마나 절감할지 가늠해 보고 특정 과제에 힘을 싣거나 특정 과제를 아예 없앨지 등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속한 부서의 연구진들은 더욱 고삐를 조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른 과제와 경쟁을 붙이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분야가 으레 기초 연구 쪽이니까.
"이 과제를 통해서 관람객을 얼마나 더 모을 수 있죠?"
"구체적으로 얼마의 수익을 낼 수 있나요?"
기초 연구 분야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단시간에 내놓지 못한다. 다루는 연구 주제가 자연을 보전하는 쪽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요, 다 좋은데 그 식물 지켜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개발로 얻을 수 있는 이익 중에 뭐가 더 우위에 있나요?"
수학 문제 풀 듯이 단번에 답을 딱딱 적고 부등호를 매길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식물들의 잎이 말라 간다고 해서 식물이 발달을 멈추는 건 아니다. 더 치밀하게 세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겨울을 준비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하듯이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 나무는 그렇게 눈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는다.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낙엽의 시절에 든다. 그러고 나면 나무는 다가올 혹독한 시절을 견딜 어떤 힘을 얻는다. 그러니까 그건 나무가 성장하는 방식이자 생존 전략이다.
올해 내가 담당한 과제는 크게 서식지에 대한 연구와 종에 대한 연구 두 가지다. 전자는 산 하나를 두고 그곳에 사는 식물 종류를 낱낱이 밝히는 거다. 산의 정상을 기준으로 동서남북과 그 사이사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가보고, 그곳에서 만난 식물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일. 올해는 덕유산 근처에 있는 해발고도 1,300m의 산지 3곳을 해빙이 시작되던 3월부터 10월까지 치열하게 조사했다. 대략 600종 정도의 식물을 만날 수 있었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자면 '이 산에 이만큼 다양한 식물이 삽니다. 그중에 정원 소재로 좋은 식물과 약이 되는 식물과 산채로 유용한 식물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구간은 희귀 식물의 집단 서식지로 확인되었으니, 개발을 계획할 경우 별도의 보전 대책 마련이 필요합니다.'정도다. 후자는 특정 종을 타깃으로 표적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제안한 기준을 적용하여 국내에서 시급하게 보전해야 하는 종을 찾아내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기록하는 일. 벌깨풀과 노랑팽나무와 문수조릿대를 정말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그중 벌깨풀은 지구상의 남방 한계지가 강원도 삼척이다. 이 북방계 식물은 북한에서도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하여 보전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벌깨풀의 국내 자생지는 단 네 곳. 그중 한 곳이 지난해 시작된 관광지 개발로 몽땅 훼손된 것을 이번 조사를 통해 목격했다. 이러한 결과를 정량화된 경제적 가치로 어떻게 답해야 할까.
'수목원이 보전 연구도 하는구나, 식물만 잘 키우면 되는 거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식물로 채워진 그 장소에서는 생각보다 더 다양한 일이 복작거리며 진행된다. 450여 명 정도 되는 나의 동료들은 각자의 부서에서 저마다의 소임을 갖고 살뜰히 일한다. 수목원을 찾아온 관람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친절히 안내하는 일, 전보다 더 '신박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일, 다채로운 주제와 단단한 철학을 담아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식물 전시를 기획하는 일, 웹 기반의 관람 서비스와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하는 일, 맞춤형 반려 식물과 정원 소재 개발에 매진하는 일, 지역의 농가에 도움이 될 사업을 이끄는 일, 식물의 원료에서 새로운 효능을 찾아내는 일, 전 세계에 단 2개뿐인 시드볼트 가운데 하나인 경북 봉화의 시드볼트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 호랑이숲을 가꾸어 백두 대간의 상징과도 같은 호랑이를 정성껏 돌보는 일...
이렇게 다양한 일들 사이에서 내가 하는 연구 분야가 돋보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목적도 방법도 각기 다른 수목원의 일들을 단순한 경제 논리를 가지고 서열을 따져야 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발 벗고 나선 그 일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것인지를 나는 잘 모르겠다.
지난여름 첫 책이 나오고 예상치도 못한 관심과 인사를 참 많이 받았다. 그중에 수목원 동료들이 건넨 어떤 말들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물기도 했다.
"그간 지나치기만 했던 연구 부서의 일들을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네요, 고생 많으십니다."
"책에서 말한 '초록노동자'라는 표현이 제게도 참 와닿았습니다. 큰 위로가 되더군요."
"우리 애가 책 보고 수목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네요, 고마워요"와 같은 온기를 품은 희망찬 말들.
그 따뜻한 격려에 힘입어 2022년 평가회 준비를 더 야무지게 할 수 있었다. 혹여나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할지라도 나의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묵묵히 밀고 나가야겠다는, 그래서 식물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이 초록(草錄)의 일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게 담아서. 그러는 동안에 겨울이 내 앞에 바짝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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