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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내의 작가 피정] 번역은 오아시스다
노시내의 작가 피정 (1)
번역은 내게 행위라기보다 어떤 공간에 가깝다. 일터라기보다 쉼터이고 오아시스다.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사느라고 새로운 환경과 급변하는 일상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번역은 내가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는 한결같은 공간을 제공한다. (2022.11.10)
피정(避靜),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번역가 노시내는 지난봄 취리히로 40일간의 피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소란합니다. 26년 동안 6개 도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 음식들, 언어들이 피정의 내밀한 시공간을 흔듭니다. 〈노시내의 작가 피정〉은 그 기억과 인연의 일기이자 그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삼아 번역해낸 글입니다. |
한 출판사에서 번역 제안 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선호하는 종류의 책이고 여성의 활약이 중심이 되는 글이어서 맡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마감해야 하는 날짜가 촉박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 답변을 보냈다. 편집자께서 실망하셨을 텐데도 다시 상냥한 답신을 보내오셨다. 속히 다른 좋은 번역자를 만나 순조롭게 출간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내 격려에 힘이 난다며 이렇게 보태셨다.
"평화와 안녕을 바라기 힘든 시절이지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견디는 것 같아요."
그 말을 곱씹으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리고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네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번역은 나를 여러 번 구해주었다.
번역은 내게 행위라기보다 어떤 공간에 가깝다. 일터라기보다 쉼터이고 오아시스다.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사느라고 새로운 환경과 급변하는 일상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번역은 내가 안심하고 들어설 수 있는 한결같은 공간을 제공한다. 익숙해서 편안한 안식처이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피난처이다. 문밖에서와는 달리 익숙한 언어를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 정제시켜 조심스레 안고 갈 수 있는 '안심 공간'이다. 집중해서 번역하면 세상이 어느 순간 눈앞에서 마술처럼 사라진다. 그 특별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 홀로 단어들을 부여잡거나, 공중에 던져 저글링을 하거나, 씨실 날실로 엮어내거나, 이리저리 천 조각처럼 덧붙여 퀼트를 만든다. 그것 말고 그 구역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그 안에서 시간은 때때로 확장되어 그 순간이 영원히 종료되지 않을 것만 같고, 때로는 축소되어 세 시간이 3분처럼 느껴진다.
내가 긴 외국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것도, 하루의 여러 시간을 번역에 쏟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번역을 하는 시간은 한국에서 하더라도 똑같이 소모되므로, 어찌 보면 나는 번역을 하지 않는 순간에만 외국에 사는 것이다. 그렇게 방랑의 세월을 토막 내면 비록 삶의 절반인 26년을 외국에서 보냈다고 해도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번역은 연기와 비슷하다. 번역자는 원저자가 의도하는 것을 짚어내어 어조와 감정의 결을 살려내는 일을 수행한다. 원저자가 해당 언어로 읽는 독자에게 유머, 냉소, 반어법을 통해 일으키는 반응을, 번역자는 번역서를 읽는 국내 독자에게도 똑같이 일어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연기자가 캐릭터를 해석하고 글로 적힌 캐릭터의 대사를 말로 바꾸어 청중에게 전달하듯, 번역자는 원저자에 빙의하여 원서를 해석하고 그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물론, 해석에는 일정한 폭이 허용되기 마련이므로 번역자에 따라 전달 내용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그 폭이 문학에서는 더 늘어나고, 논픽션에서는 줄어들고, 한국어와 일본어처럼 언어가 유사하면 더욱 좁아진다. 그래서인지 비록 단 한 번 시도해보았지만, 일본어 논픽션 책을 번역하는 작업은 재미가 덜했다. 내가 기계적으로 번역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번역은 소설 번역이었다. 해석의 폭이 넓으니 옮길 때 고를 수 있는 단어의 가짓수가 훨씬 많아지고, 수많은 선택의 여지 앞에서 결정을 못 하고 손가락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시 번역은 한층 더 어려울 것이다. 문학을 번역하시는 분들에게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나는 천상 논픽션 영어책 번역가다.
번역은 내게 혹독하고도 즐거운 글쓰기 훈련의 시간이기도 하다. 좋은 원서라고 해서 모든 문장이 주옥같은 것은 아니다. 책을 옮기다 보면 원저자의 문장과 글의 짜임새가 좋은지 나쁜지 인지된다. 좋은 문장은 번역할 때 그 자체로 좋은 학습이 된다. 영어로 좋은 문장은 잘 번역하면 한국어로도 좋은 문장이 된다. 행여 좋지 않은 문장을 만나도,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내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깔끔하게 손질한다. 그렇게 균형을 잡아 읽기 좋은 글로 옮겨낸다. 이 과정 자체가 훌륭한 글짓기 훈련이다. 나쁜 문장은 나쁜 문장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문학이 아니라 정보를 얻는 것이 주된 목적인 논픽션이라면 국내 독자가 번역서를 읽고 이해하기 좋도록 옮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렇게 해서 편집자의 손을 거쳐 되돌아온 원고를 재검토하는 - 역시 혹독하고도 즐거운 -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고 나면, 글에 대한 감각은 매번 조금씩 더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나의 글쓰기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지금 내가 여기에 써 내려가고 있는 글에도 지난 15년간 번역 일을 하면서 얻은 경험의 불가피한 자취가 남아 있다. 좋은 문장은 그 경험의 덕을 본 것이고, 나쁜 문장은 그 경험의 부작용이거나 그 경험으로부터 아직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증거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번역 일이 앞으로도 계속 오아시스로 남아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다. 그저 그 안에서 마른 목을 축이며 시간이 왜곡되는 순간을 오롯이 즐길 뿐이다. 그 즐거움은 역설적으로 공포를 부른다. 책을 한 권 번역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번역서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다. 근거 없는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의 유한성이 너무 생생하다. 그렇다면 그 원초적인 감정을 외면하기보다는 똑바로 쳐다보고 동력으로 삼는 길도 있다. 한 권 한 권을 마지막 책처럼 정성스럽게 작업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중 한 권이 진짜로 마지막 책이 될 때, 나는 아무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뿌듯한 마음으로 오랜 세월 나를 보듬어주었던 쉼터의 셔터를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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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지를 떠돌며 27년째 타국 생활 중이다. 《마이너 필링스》 《책임 정당》 《대표》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등의 책을 옮겼고 《작가 피정》 《스위스 방명록》 《빈을 소개합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