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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의 오늘 밤도 정주행]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 <트루 디텍티브>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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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반복되는 꿈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복되는 꿈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2022.11.07)

일러스트_김지희

드라마의 첫 화면. 어둠 속에서 불타는 숲속. 그러고 나서, 한 남자가 심문을 받고 있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 남자는 경찰에서 은퇴한 지 꽤 된, 이제는 사립 탐정 일을 하고 있는 마틴 허트이다. 그는 후배 형사들로부터 오래전 그의 파트너였던 러스트 콜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러스트는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몇 년 전 다시 나타난 참이다. 마틴과 러스트는 17년 전, 그들이 경찰이던 시절에 끔찍한 살인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다. 기괴하게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사슴뿔로 만든 왕관을 쓰고, 몸에는 이상한 표식이 새겨진 벌거벗은 여성이 기이한 자세로 죽어 있던 사건. 그들은 상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단서를 좇았다. 그리고 결국 범인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감금된 아이 둘을 구출해 냈다. 다른 장면에서 러스트 역시 후배 형사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는다. 차근차근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마틴과 다르게 러스트는 시종일관 고약한 태도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자라 있고, 얼굴은 번들거린다. 은퇴한 후 술집에서 일하며 술에 빠져 살고 있다는 그는 금연 구역인 심문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신다.

많은 사람들이 미드 수사물의 대표작으로 <CSI>를 꼽았던 시절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토요일 오후에 공중파 방송에서도 방영을 했던 이 드라마는 특별히 미드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 미드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상대 중 대부분이 <CSI>는 안 보냐고 물어보곤 했다. 내게는 그 드라마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로 앤 오더> 시리즈나, <콜드 케이스> 같은 드라마들도 몇 번 보다가 말았다. 그러므로 <트루 디텍티브>도 한동안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17년 전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은퇴한) 형사들의 이야기. 그런데 이 드라마를 왜 봤냐고? 그건 순전히 우연히 본 오프닝 덕분이었다. 

시작은 그랬다. 누군가 나에게 미드 최고의 오프닝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매드맨>과 더불어 <트루 디텍티브>를 언급할 것이다. 잿빛 도시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물속의 사람, 성조기가 그려진 수영복을 입은 여성, 공허하게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 그리고 그 화면 속에서는 향수를 자아내는 듯한 컨트리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마 이 드라마를 보게 된다면, 그러니까 회차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도시는, 누군가와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이런 위험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탐욕은 불가결한 것인가? 왜 그 탐욕의 대상은 언제나 아이들과 여자들인가? 그리고 마지막 화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 어떤 사람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이유 그 하나만으로도 그토록 손쉽게 범죄를 저지르고 보호받는 것일까? 그리고 이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될 것이다. 왜 아이들과 여자들은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는가?

형사들에게 과거에 대한 질문을 받던 러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왜 내가 과거 속에서 살아야 하나? 이 세상 일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누가 그러더군. 시간은 원 같은 거라고. 우리가 했던 일이나 앞으로 할 일들은 끊임없이 반복될 거야. 그 남자애와 여자애는 또다시 그 방에 갇히게 돼. 갇히고, 또 갇혀. 영원히."

러스트는 인간은 질병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은 번식을 관두고 다 같이 손잡고 멸종하는 거라고, 최후의 날 밤에 모두가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죽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내가 증언자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진짜 대답은 이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거죠. 자살할 체질도 아니고요."

그는 타인에게 동정심이나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주고 싶어 하지도, 누군가로부터 갈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이어서 그가 어떤 종류의 책임감을 거의 강박적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17년 전 자신이 해결했다고 믿었던 그 사건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마틴은 러스트와는 달리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적어도 17년 전에는 그랬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이 있었고, 경찰서 내에서 좋은 입지를 차지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 미성년자 매춘부에게 돈을 쥐여주며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말할 정도의 동정심도 있었다. 그런 그를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지도.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그는 바람을 피웠고, 심지어는 그게 범죄 현장에서 묻어오는 나쁜 것들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가족을 위한 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기변명을 일삼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질병이라는 러스트의 판단은 너무나 옳은 것이 아닌가? 과거를 회상하던 마틴은 자신의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무관심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다.

러스트는 심문을 받는 동안 형사들에게 인간의 삶은 멍청한 의미로 만든 모래성이고, 사랑, 증오, 기억, 고통, 그 모든 게 일종의 꿈이라고, 마지막에 괴물이 등장하는 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형사들의 심문실을 박차고 나와서 마틴을 쫓아간 러스트는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전히 죽어가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다고, 혹은 죽음조차 은폐된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다고 그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과 타락의 연속인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신은 영영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방금 전까지 악몽을 운운하던 사람이 저런 말을 내뱉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곧 깨닫는다. 인간은 질병이고, 삶은 악몽에 불과하고, 모든 것은 그저 반복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러스트는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러스트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끔찍한 악몽의 반복을 끊어내기를 바라는 사람인 것이다. 마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에 저지른 자기 자신의 과오를 그런 식으로 속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그들은, 러스트와 마틴은 폭력과 타락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트루 디텍티브>의 세계는 <CSI>의 세계와는 정반대에 놓여있다. <CSI>의 세계에서는 과학과 수사와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세계, 모든 것이 말끔하게 재단된 세계이다. <트루 디텍티브>의 세계에서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우리는 이 끔찍한 범죄자들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지 도저히 알지 못한다.(혹은 알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 바깥에 있다. 지저분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세계. 러스트와 마틴은 죽음을 무릅쓰고 범죄자를 찾아내지만, 결국 진짜 범인을 처단하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 휠체어에 탄 러스트와 마틴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들은 어둠과 빛,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에는 어둠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다고. 그렇지만 러스트는 곧 생각을 바꾸고 이렇게 말한다.

"아까는 잘못 본 것 같아요. 하늘 말이에요. 태초에는 어둠만이 있었는데 내 생각에 빛이 이기고 있는 것 같아요."

러스트와 마틴이 살아가는 세계는 여전히 끔찍한 범죄들로 가득 차 있다. 범인들은 멀끔한 얼굴을 하고 배를 두드리며 살아갈 것이고, 또다시 여자들은 죽고, 아이들은 갇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러스트와 마틴 역시 다시 여자들과 아이들을 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너무 좌절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어질지라도, 목숨을 걸어애 할지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삶은 반복되는 꿈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반복되는 꿈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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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보미(소설가)

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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