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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의 그림책 읽는 시간] 『고무줄은 내 거야』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1월호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연필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관점의 차이였다는 것을 말이지요. (2022.11.04)
또 새로운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바쁜데 무얼 더 벌이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제 나이 마흔이 되면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고요? 바로 제 취향을 담은 물건을 파는 편집숍을 운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물건을 소개하고 그 물건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이 만족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어릴 때는 모름지기 내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오프라인 공간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구비해 놓고 싶었지요.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리고 비용도 비용인지라, 현실적인 상황을 생각해 일단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시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해보겠다고 결심했던 게 올여름이었는데, 계절은 어느새 가을을 지나 겨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관련된 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새 물건을 선택하고,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이 제 일상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편집숍의 이름은 '생활명품'에 저의 이름 한 자를 붙였지요.
저는 물건을 참 좋아했던, 혹은 소유를 좋아했던 아이였습니다. 학교 가는 건 썩 즐겁지 않았지만 오가는 길에 문구점에 들르는 걸 그때의 낙으로 여겼습니다. 나보다 예쁜 학용품을 산 친구가 있으면 기어코 그 물건을 찾아내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물건 중에서도 저는 '새것'을 좋아했습니다. 새것만 찾았고 새것을 소유해야 진정한 행복이 밀려왔습니다. 연필을 쓰다가 닳은 느낌이 들면 그 연필을 차마 버리지는 못하니 한곳에 모아두고 다시 새 연필을 깎아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제 필통에는 늘 새것들만 가득했습니다. 어디 필통뿐이었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갔습니다. 노트를 펼쳐 쓰고 그리며 놀다가 저는 새것으로 가득한 제 필통을 자랑스럽게 펼쳐 놓았지요. 친구 역시 필통을 열었는데 거기서 저는 생소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새 학용품이 아닌 오래 써서 낡고, 닳은 연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필은 너무 짧아져서 색연필 몸통에 연결해 놓기까지 했더군요. 그때 친구의 엄마가 곁으로 와 필통 안에 있는 몽당연필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깎아 줬습니다. 너무 짧아져 연필 깎는 칼이 필요했던 그 몽당연필을요. 그러면서 말하더군요.
"이 연필은 친구 생일에 이모가 선물로 사 준 거란다. 그리고 이건 아빠가 외국 출장을 다녀오며 사다 준 거지. 많이 짧아졌지만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워서 이렇게 계속 쓰고 있단다."
세상에나, 이런 걸 요즘 말로 플렉스라고 하나요.
연필을 설명했을 뿐인데 세상 귀한 물건을 소개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샘 많기로 뒤지지 않았던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제가 가진 연필을 부러뜨려 몽당연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마치 연필이 짧아져야 가치가 있다는 듯이 말이지요. 당연하겠지만 그런데도 내가 부러뜨린 몽당연필에서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연필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관점의 차이였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림책 『고무줄은 내 거야』는 흔해빠진 고무줄에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는 아이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쓰레기통 귀퉁이에 떨어진 고무줄을 본 아이. 평범한 고무줄이었을 뿐인데, 고무줄은 운명처럼 아이에게 다가왔습니다. 늘 오빠한테 물려받은 물건, 친구들과 나눠 쓰는 물건, 잠깐 빌려 쓰는 물건들에 이미 질려 있는 상태였거든요. 아이는 진짜 자신만의 물건을 갖고 싶었습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고무줄을 말이지요. 그날부터 잠을 잘 때도 목욕을 할 때도 고무줄과 함께였고, 아주 오래오래 이 고무줄과 함께이고 싶었습니다. 애정을 쏟다 보니 고무줄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보였습니다. 머리를 묶어 멋을 낼 수도 있었고 외계인을 잡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고무줄에 애착을 갖는 과정을 통해 그림책은 진짜 소중한 물건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랫동안 꿈꿨던 나의 편집숍. '생활명품'이라 이름 짓고 거기에 제 이름까지 붙였으니 허투루 물건을 소개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디서나 쉽게 사
고파는 물건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일단 저는 제 편집숍의 중심을 잡아줄 만한 문장을 써봤습니다.
"오랜 시간 당신과 함께할 물건을 제안합니다. 세상의 관심은 물건을 더 싸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싸게, 더 많이 만들어 수익을 늘리려 합니다. '생활명품 애'의 관점은 다릅니다. 우리는 튼튼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우리 곁에 오래 머무를 물건을 지향합니다. 누군가 신념을 가지고 만든 좋은 물건을 제안합니다."
너무 힘을 준 건 아닌가 걱정도 됐지만 이 정도 각오로 시작해야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친구의 몽당연필을 보며 진짜 좋은 물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깨달음을 얻었던 제가 이제 진짜 좋은 물건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일을 시작했다고 여겨지겠지요. 하지만 제 일을 통해 누군가는 자신만의 몽당연필 혹은 나만의 고무줄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역시 즐거운 일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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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하고 글을 쓰며 애TV그림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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