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의 뒷면] 피할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 『녹스』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1월호
책 만드는 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아코디언북이라는 물성, 거기에 시인 앤 카슨이 오빠를 떠나보내고 만든 애도의 기록이라는 사연이 단번에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2022.11.03)
2018년 3월 7일, 윤경희 번역가로부터 『녹스』의 제안서와 샘플 원고를 받았습니다. 책 만드는 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아코디언북이라는 물성, 거기에 시인 앤 카슨이 오빠를 떠나보내고 만든 애도의 기록이라는 사연이 단번에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몰라도, 출판사 대표로서는 절대 욕심내선 안 될 책이었습니다.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한 책, 팔기는 더더욱 어려운 책이 분명해서요. 그렇게 『녹스』는 잠시 제 마음에 머물다 떠났습니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8개월이 지나고 다시 번역가를 만났습니다. 『녹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지요. 번역가는 그때 "내가 출판사를 차려서라도 이 책을 꼭 내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사로잡은 책이라고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애정을 갖는 책이라면 제가 만들어 보겠어요."라고 약속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그날부터였습니다. 물론 이렇게 지난하고 곡절 많을 줄은 미처 몰랐지요.
저작권 계약을 맺고, 번역가와 계약서를 쓰고, 마감일을 다소 지나 (라틴어 감수까지 마친) 원고를 받고, 두 번 세 번 네 번 교정을 보고, 시인의 교열을 거치고, 그 시인의 '추천의 글'을 받고, '옮긴이의 글'을 받고, 또 두 번 세 번 교정을 보고, 정확한 '옮긴이 주'를 달고... 시간은 꽤 걸렸지만, 대개는 예측이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하는 마음으로 한 달 뒤인 8월 31일을 판권일로 적었습니다. 당연히 그 전에 책이 나오리라 믿었고요.
이제 인쇄를 마치고, 제본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적잖은 품이 들어가는 수작업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간과 비용만 지불한다면 어렵지 않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0쪽에 이르는 아코디언북을 만드는 일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 그래서 시간도 비용도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작이 가능한지조차 불분명했고요. 그렇게 인쇄물은 한 달여를 창고에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 업체에 문의했지만 하나같이 난감해했습니다. 이제는 책이 나올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오래전 알고 지내온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활판공방'에서 이 어려운 작업을 맡아주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수제 제본 작업을 해온 두 어르신(장인)이 묵묵히 이 단조롭고 규칙적인 일을 끝까지 잘 마쳐주었습니다. 권용국, 김평진 선생님, '활판공방'의 박한수 대표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한 달 반을 작업한 여러 분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알리고 파는 일은 더 어려울 듯했습니다. 최대한 책값을 낮게 매겨도 5만5000원이었습니다. 앤 카슨을 좋아하는 독자라도 그 돈을 내고 책을 사기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혹시 『녹스』를 먼저 읽은 여러분이 각자의 소감을 들려준다면 좀 더 책에 관심을 갖지 않을까, 혹시 (그중 일부가) 책을 사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앤 카슨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름들, 앤 카슨을 좋아할 법한 이름들을 하나하나 적어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녹스』 가제본을 제공하고 먼저 읽은 소감을 청했습니다. 원고료 대신 앤 카슨의 『녹스』와 『플로트』를 선물하고 싶다는 죄송한 부탁과 함께요. 놀랍게도 연락드린 거의 모든 분이 "그렇게 하지요." 하셨습니다. 시인, 소설가, 작가, 번역가, 서점원, 편집자, 출판인, 디자이너 등이 특별한 소감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누구는 책의 물성에, 누구는 번역에, 누구는 떠나보낸 형제, 반려동물에 집중해서요. 그 고마운 이름들을 적어봅니다. 강소영, 강영희, 김뉘연, 김리윤, 김서연, 김선오, 김성중, 김연덕, 김유림, 김지승, 나희영, 목정원, 문보영, 민은경, 박솔뫼, 박연준, 백은선, 서이제, 신해경, 오지은, 오혜진, 유지원, 이다혜, 이소호, 이수정, 이승학, 이주혜, 장영은, 장인애, 장혜령, 전승민, 정다연, 정은숙, 정한샘, 조순영, 조해진, 차경희, 최리외, 최진규, 한강, 홍한별, 황희수. 모두들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책이 무사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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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책에서 책을 만듭니다.
<앤 카슨> 저/<윤경희> 역55,000원(0% + 0%)
"오빠가 죽었을 때 나는 책의 형식으로 그를 위한 묘비명을 만들었다. 이것은 그것에 가능한 한 가깝게 한 복제본이다." - 앤 카슨 『녹스』는 시인이자 번역가, 고전학자인 앤 카슨이 1978년부터 2000년까지 22년 동안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고 헤어져 지내던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