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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솔의 적당한 실례] 모자 장수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1월호
엄마는 모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팔기 시작했다. 그러면 무엇이든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게 오판이라는 것 또한 삽시간에 드러났다. (2022.11.03)
한영씨공방은 2022년 1월 문을 열었다. 그것은 누구네 집 방문을 여는 것만큼이나 아무런 파급력이 없었다. 동대문의 어느 작은 공장에서 아이패드에 끼적인 손글씨로 라벨을 제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결코 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모자 장수가 된 것이다.
엄마는 일 년 전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귀촌했다. 운전도 할 줄 모르고, 남편도 없는 데다 몸도 성치 않으니 썩 기대되는 결정은 아니었다. 그즈음 같이 사주를 봤는데 명리학자가 절대 가서는 안 된다고 뜯어말렸더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평생 처음 가져보는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갈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맨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나다(Canada) 가서도 잘 살 거야."
영어 한 글자도 할 줄 모르는 엄마가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생 일해 온 봉제 기술 덕분이었다. 생활에 필수적인 의식주 영역이니 기술 이민도 갈 수 있고 어디서든 먹고살 수 있다는 거였다. 그게 오판이라는 것은 삽시간에 드러났다.
엄마는 재봉틀을 다 싸 들고 가서 사람들에게 재봉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코로나19가 터졌다. 읍내 주민센터까지 재봉틀을 옮기는 건 불가능했고, 사람들이 집으로 올 수도 없었다. 엄마는 사람들 옷을 수선해 주면서 근근이 벌면 된다고 했다. 이웃이 다섯 가구 있는 마을에서 옷이 구멍 나는 일은 가물에 콩 나듯 일어났다. 그러자 근처 공장에 취직하면 된다고 했다. 이력서를 넣었으나 엄마보다 젊고 건강하고 운전도 잘하는 아줌마들이 줄을 섰다. 뭘 좀 해보려고 읍내라도 나가려 치면 버스로 20분이 걸렸다. 버스는 하루에 두 번 왔다.
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한두 개의 변수만으로도 아주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버스가 두 번 오거나, 재봉틀이 너무 크고 무겁거나, 옷에 구멍이 나지 않거나, 어떤 공장에 자리가 없거나 하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망할 수 있었다. 그런 터무니없이 작은 변수로 인해 삶을 통째로 흔드는 것이 바로 가난이라는 것도. 엄마는 꼬박 일 년 동안 한 푼도 벌지 않고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었다. 일하지 않는데도 몸은 여기저기 꾸준히 아팠다. 평생 무리해서 일해 왔기 때문이었다. 내 주변에는 엄마와 비슷한 나이에도 새로운 일을 배우고 뛰어다니며 일하는 아줌마들이 있었다. 그들과 엄마는 전혀 다른 몸의 성적표를 받은 것 같았다.
엄마는 서울에 혼자 사는 외동딸이자 유일한 가족인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덧붙였다.
"알아서 할 거니까."
그러고선 어느 날 갑자기 집채만 한 크기의 농기구들을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새로운 농기구를 개발해서 팔아 보는 건 어떨까?"
우리 엄마 한영 씨는 걸을 때 절뚝거리는 게 보일 만큼 다리가 안 좋다. 마당에 있는 풀을 두 시간만 뽑아도 무릎이 나가서 다음 날 하루는 한의원 신세를 져야 하고, 평생 흙이라고는 환갑 넘어 처음 만져보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완전히 알고 있었다. 그건 마치... 내가 글쓰기 싫은 것이 극에 달한 순간 친구들에게 "나 지질학자나 되어볼까?"하고 묻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심심할 때마다 모자를 만들었다.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도시에 살다 시골에 내려와서 어쩌다 한 번 거울을 보는데, 그때마다 화들짝 놀랐다는 것이다. 거울 속 자신이 너무 새까맣고 남루해서다. 특히, 이리저리 눌리고 엉키고 숭숭 비어 있는 머리가 가관이었다. 집에 지천으로 널린 게 천 쪼가리였고, 당장 몇 개를 재단해 모자를 만들어 눌러썼다. 그제야 좀 봐줄 만했다.
그것이 꽤 예뻤다. 세상에 모자는 많지만 그런 모양은 본 적이 없었다. <이웃집 토토로>의 토토로와 비슷하게 생긴 우리 엄마도 그 모자를 쓰면 햇빛처럼 투명하고 꽃잎처럼 가녀린 소녀의 느낌이 났다. 우아하면서도 소박하고 깔끔한 멋을 풍겼다. 무심코 만든 것이라기엔 오랜 세월 숙련된 장인의 내공이 보였다. 오는 손님마다 엄마의 모자를 탐냈다. 엄마는 쓰고 있던 모자를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벗어 건네주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말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엄마. 모자 팔자."
그렇게 한영씨공방은 환장의 듀오가 운영한다. 환상의 듀오 아니다. 모자의 재료를 수급하고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것 일체는 한영 씨의 몫이다. 그렇게 제작된 모자를 검수하고 코디해서 촬영하고 편집해서 게시하고 홍보하고 고객 관리하고 배송하는, 그 외 모든 것이 내 역할이었다.
작가이자 가끔 연재 노동자, 강연자, 워크숍 진행자, 글쓰기 강사, 행사 MC,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의 일을 하는 나는 또 하나의 생각지도 못한 직업에 도전하면서 진정한, 완전한 N잡러로 거듭났다. 모자 장수가 된 것이다. 엄마는 모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팔기 시작했다. 그러면 무엇이든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게 오판이라는 것 또한 삽시간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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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소상공인.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