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마시는 사이는 새로운 가족"
에세이 『마시는 사이』
95%의 헛소리를 하다가도 술의 힘을 빌려서 5%의 진심을 말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그게 큰 위안이 된다. (2022.10.19)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 소설처럼 읽어주면 좋겠다. 가능하면 술 한잔 옆에 놓고." _11쪽
이현수 저자의 에세이 『마시는 사이』는 그가 사랑하는 술자리를 닮았다. 킬킬 웃으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종내에는 찔끔 눈물짓게 되는 책. 95%의 농담 같은 이야기 사이사이, 저자가 숨겨둔 5%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현수 저자는 <프리미어>, <필름 2.0> 등의 편집장을 지냈고, '이언 매큐언'의 『이런 사랑』,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 등 500여 권의 잡지와 책을 만들었다. 일에만 푹 빠져 살던 그는 믿었던 이에게 큰 상처를 받고 불현듯 뉴욕으로 떠난다. 삶의 레일 한 가운데서 풀썩 주저앉은 그를 다시 일으킨 건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이현수 저자는 "가족이 되어준 친구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함께 술을 마시다 어느덧 가족처럼 가까워진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다. '마시는 사이'라는 제목에 딱 맞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황선우 작가가 지어준 제목이다. 언젠가 황선우, 김하나 작가와 대화를 하던 도중 이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뉴욕에 살면서 술을 마시다가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고, 나에게 가족이 되어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더니 황선우 작가가 불현듯 "제목은 '마시는 사이' 어때?"라고 말했다. 듣자마자 재밌다고 생각했지만 곧장 제목으로 정한 건 아니었다. 출간 직전까지 수많은 후보를 생각했는데, 매번 '마시는 사이'로 되돌아갔다.
23명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책을 본 그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정말 좋아해줬다. 이 책은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친구들에게 보은을 하기 위한 책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가장 중요했다. 책에 등장하는 친구인 동군, 홀리 부부는 사진을 하나 보내줬다. 육아를 하느라 바쁜 와중, 홀리가 부엌 싱크대 한 편에 서서 책을 읽으며 우는 뒷모습이었다. 그 메시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동군과 홀리 사이에서 태어난 7세 어린이 '뿜이'와의 관계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이 차를 뛰어 넘은 우정이 아름답더라.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뿜이였다고.
뿜이의 베이비 샤워를 하면서부터 내가 본격적으로 술에 빠졌기 때문이다.(웃음) 뿜이네 집은 여럿이 모여 술을 마시기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거기서 친구들과 모여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사실 뿜이와의 에피소드가 정말 많은데 책에는 거의 쓰지 못했다. 잘 쓸 자신이 없었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우리의 추억을 풀기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뿜이의 이야기도 고민 끝에 맨 마지막에 써서 보냈다. 이상하게 책이 나오고 난 뒤 뿜이네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마음이 글로 잘 표현되었을지 걱정도 되고.
읽는 내내 뿜이가 어떤 어린이일지 궁금했다.
명랑하고 개그 본능이 뛰어난 친구다.(웃음) 동군과 홀리가 초보 양육자였을 때,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 집을 자주 찾았다. 아이와 놀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잠깐이라도 부모가 숨을 돌릴 수 있으니까. 처음에는 동군과 홀리를 위한 일이었는데, 뿜이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너무 컸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나를 최고라고 생각하고 사랑해주는 게 감동이었다. 뿜이는 말이 조금 느렸는데, 어느 날 옹알이를 하고 있어서 자세히 들어보니 노랫말에 내 이름을 넣어서 "이모, 이모"하고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우리 사이에는 이런 일화가 정말 많다. 한 사람의 성장과정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은 뿜이가 처음이다.
친구가 많은 사람은 '타인에게 잘 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어떤 모습을 볼 때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
지루한 걸 못 견디는 성격이라 재밌는 사람이 좋다. 웃겨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화의 코드가 잘 맞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하는 것도 굉장한 재미다. 결국 성향이 잘 맞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거 아닌 이야기도 우리 사이에서는 즐겁고 흥이 난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을 땐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지켜보고 생각한다. 원래 육아에 관심이 없지만, 뿜이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 육아를 하게 된 것처럼.(웃음)
뉴욕에 가기 전에는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았다고.
영화지 편집장으로 일하던 시절, 마감 때마다 교정지를 기다리며 동료들과 종종 술을 마시는 정도였다. 그러다 뉴욕으로 떠났고, 적당히 술을 마시면 잠이 오지 않아서 몇 달을 매일 술에 취해 지냈다. 술 마시면서 잠들고, 눈을 뜨면 또 술을 마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후배의 소개로 동군, 홀리 부부를 만나면서 즐겁게 술 마시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갔던 것 같다. 함께 술을 마시며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사귀었다.
술이 좋은 이유는?
일단 술이 있으면 그 자리가 즐거워지지 않나. 춤추고 노래하고, 아무 말이나 해도 허용이 되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또, 95%의 헛소리를 하다가도 술의 힘을 빌려서 5%의 진심을 말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그게 큰 위안이 된다.
거침없고 자유로운 삶의 태도가 인상깊었다. 김혼비 작가는 추천사에서 "최선을 다해서 이현수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뉴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일했고, 삶의 중심에 언제나 일이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업계 동료가 친구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에서는 누군가와 가까워져도 늘 긴장을 했던 것 같다. 혹시 실수를 하면 '저 여자랑 같이 일 못하겠다'라는 생각을 할까 봐. 뉴욕에서 이 생각이 전부 깨졌다. 내가 몇 살인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사람인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술자리에서 지루해하지 않고 즐겁게 놀 수 있다면 누구나 친구가 됐다. 그렇게 한번 틀을 깨자 자유가 찾아왔다.
뉴욕에 산 경험으로 가장 달라진 게 무엇인가?
한국이었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들을 많이 했다. 소셜 마케팅이나 행사장 백스테이지 진행 등 경험해보지 않았던 분야에 도전했던 거다. 한국에서는 일 못하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어서, 자신 없는 건 애초에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못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웃음)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마음이 더 편해졌다.
나이가 들면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고들 한다. 친구를 사귈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있을까?
내 나이가 몇인지, 어떤 커리어를 가졌는지 등의 배경을 다 지우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친구들도 한국에서 만났다면 지금처럼 깊은 관계를 맺기는 어려웠을 거다. 뉴욕에서 사귄 친구 중 제일 오래된 사이인 '견가'는 딸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베스트 프렌드 '마일로'는 내 후배인 황선우 작가가 에디터로 일하던 시절, 그의 어시스트였다. 한국에서 만났다면 이런 배경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우리가 뉴욕에서 만난 게 다행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신기한 인연이다.
뉴욕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과거에 무서운 편집장이었다는 걸 믿지 않는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똑같은 사람인데, 이들은 나를 굉장히 착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놀랍다. 친구들이 내 모습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 책의 표지 일러스트를 그려준 우지현 작가에게 "내가 너무 착한 척하니?"라고 물어본 적도 있다. 친구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하지만, 사실 나는 착한 사람은 아니다.
우지현 작가는 뭐라고 대답했나?
"착한 사람 맞아요."라고 하길래 내가 말했다. "너도 속은 거야!"(웃음)
어머니의 투병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한동안 책 작업이 힘들었을 것 같다.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마음이 힘들어서 한참 원고를 쓰지 못했다. 독자는 이 이야기를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글을 쓸 때도 너무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되면 다시 뉴욕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 뉴욕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언젠가 한 번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나라에 산다는 건, 이런 불안을 내내 안고 산다는 의미다.
지금 '마시는 사이'인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쓴 것 같다. 앞으로 마시는 사이가 될 예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의 주접을 견뎌야 한다!(웃음) 술에 취하면 누구나 조금씩 이상해지지 않나. 아무렇게나 춤추고 노래 부르고,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이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술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의 흥을 견뎌준 친구들에게 정말 고맙고, 앞으로 만날 친구들에게는 잘 참아달라고 말하고 싶다.(웃음)
*이현수 방송 작가, 잡지 기자, 출판인, 마케터, 자유 기고가 등의 일을 해왔다. 힘든 상황을 겪으면서 일이고 친구고 가족이고 다 버리고 한국을 떠날 때는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믿지 않겠지만 뉴욕으로 건너가기 전엔 술을 그다지 마시지 않았다. 괴로워서 술을 찾기 시작했는데, 술이 먼저인지 사람이 먼저인지 여튼 술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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