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아니 에르노라는 문학 - 신유진 번역가
아니 에르노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기고
나는 진실을 찾는, 진실이 되려는 시도를 아끼지 않는 그의 문학이 평범한 삶과 언어를 가진 수많은 1인칭, 나와 또 다른 나,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임을 확신한다. (2022.10.17)
나는 이브토(Yvetot)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를 생각하면 그의 작품 속 그 소도시의 작은 카페 겸 식료품점이 눈에 훤하다. 물론, 물질적 공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은 작가, 아니 에르노와 독자인 내가 만난 문학적 장소이다.
아니 에르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1)에서 글은 하나의 장소이고, 그 안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말을 걸고 움직이며 누군가를 만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독자는 어떨까? 그 장소에 초대받은 우리는 작가의 말에 동의하거나 반박하고, 그의 움직임으로 그곳의 지형을 그리며, 그와 만남을 허락하거나 미루거나 거절한다. 우리는 그것을 독서를 통한 경험(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이라고 부른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만을 쓰는 작가의 이야기는 그렇게 일인칭 서술자 '나'를 통과하여 또 다른 '나(독자)'를 만난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문학은 개별적이면서도 특별한 자신만의 언어가 타인의 언어와 만나는 가장 독창적인 순간을 의미하며, 사적인 것들이 공적인 것들로 탈바꿈하는 공간2)이라고 했고, 우리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적 장소 안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한다.
이브토, 그곳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 '한 사람의 개성을 만드는 어떤 장소의 무시할 수 없는 역할'3)이란 게 있다면, 에르노 문학의 개성을 만든 곳은 '이브토'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 에르노는 그 도시에서 자신의 욕망을 딸에게 모두 주려고 했던 어머니와 책 같은 것은 필요 없는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그들의 카페 겸 식료품점의 단골이었던 노동자 계급과 소시민들 틈에서 성장했다. 그의 세계에서는 문학에서는 절대 쓰지 않는 언어를 썼고, 여성은 욕망을 감춰야 했으며, 드러낸 욕망은 수치심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문학보다 하위에 있다고 여겨지거나 미화, 수식 없이는 문학이 될 수 없었던 곳, 아니 에르노는 학업과 직업, 결혼을 통해 그곳을 탈출했다. 그는 그런 자신을 '계급 전향자'라 일컫는다. 혹시 여기까지 내 거친 요약을 읽은 당신이 그의 이야기가 어느 가난한 엘리트의 신분 상승 스토리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을 붙들고 꼭 그 오해를 풀고 싶다. 그의 문학은 상승이 아니라 하강하는 이야기이니까. 그는 지난 50년 동안 22편의 작품을 통해 이브토로 돌아가고 있다. 어떤 가공이나 미화, 은유 없이,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떠나온 세계를 문학적 장소로 돌려놓는다. 그는 그 돌아가는 여정의 최종 목적지를 '진실'이라 부른다.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계급과 여성으로서 경험했던 폭력과 수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진실 말이다.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있었던 일이지요. 저는 글을 쓸 때 처음부터 끝까지 그곳에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진실의 방식 안에서 아니, 진실을 찾아서, 강박에 시달릴 때까지. 나는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디테일도 지어내지 않습니다. (중략) 물론 우리는 진실을 찾지만 그것은 절대 찾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진실을 찾는 방식도 진실의 일부라고."4)
아니 에르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목격했고, 경험했던 사실을 쓴다. 그러나 글로 쓰인 사실이 진실의 동의어는 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히 일어났던 일이지만, 시간과 기억에 의해 다듬어진 사실이다. 그러니 그의 말처럼 우리는 어느 것에서도 진실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 개의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나의 진실이 당신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으므로.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문학이 진실을 찾는 길에 있다는 것이다. 거짓 없는 사실, 어떤 판단도 개입되지 않은 시선으로 아니 에르노의 언어는 그곳을 향한다. 그는 그렇게 그만의 진실한 방식으로 문학에 삶을 담는다.
생존 작가 중 최초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된 아니 에르노의 선집의 제목은 '삶을 쓰다(ÉCRIRE LA VIE)'이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이야기할 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정관사 'la'가 아니라 하나라는 뜻의 부정관사 'une'이 붙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오직 하나,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뒤에 '쓰다'라는 동사가 붙으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니 에르노의 문학을 통해서 경험한다. 시대, 사회, 역사 안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은 타인도 경험했으리라 믿는 그는 '나' 글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여 개인을 초월한 공동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한다.
"나(moi)는 '자신(soi)'으로부터 쓰지만 그 '자신'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통과한 경험으로부터 삶을 쓰지만, 그것은 삶의 이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지요. 내 생각에 삶은 모순뿐이에요. 항구적인 자아는 없습니다. 온전히 자신의 것인 기억도 없고요. 기억은 물질적이에요. 기억은 자신 밖에 있는 것입니다."5)
아니 에르노의 '나'는 문학과 사회학과 역사 사이에 있고, 그 안에서 그의 경험은 모든 형태의 삶과 조우한다. 그렇게 그의 '나'는 '나'의 안에서 '나'의 밖으로 향한다. 출발지는 그의 이야기이지만 책이라는 기항지를 거쳐 수천만 개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의 기억에 우리 고유의 경험이 더해지고, 그렇게 우리는 공동의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나눈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을 통해 어떤 '나'도 나일 수만은 없고, 어떤 기억도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니며, 하나의 삶 속에는 수많은 삶이 함께 걸음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니 어쩌면 아니 에르노의 문학은 독자인 우리에게 건너와 새로운 ‘나’의 이야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이 글을 1982년부터 아니 에르노가 소설을 쓰며 기록해 온 작업 노트, '검은 아틀리에'의 한 구절로 마무리 지어보려 한다.
"조금의 진실이 되게 하기 위해 쓸 것. 그러나 그 진실이 한 명의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진실을 찾는, 진실이 되려는 시도를 아끼지 않는 그의 문학이 평범한 삶과 언어를 가진 수많은 1인칭, 나와 또 다른 나,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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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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