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여우와 나』 캐서린 레이븐 저자 인터뷰
『여우와 나』 캐서린 레이븐 작가를 만나다
『여우와 나』는 어떻게 우정을 쌓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공감은 우정의 관문이지요. 나는 다른 생명체들에게 목소리를 주면서 공감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2022.10.13)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여우와 나』는 작가로서 대중서로는 첫 작품임에도 출간과 동시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책을 내고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반응이 있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먼저 독자들이 『여우와 나』에 보내준 모든 애정에 감사를 전합니다.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 독자들로부터 받은 메일에 최대한 빨리 답을 하려고 해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손을 내밀어 나에게 각자의 동물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 삶으로 들어왔어요. 그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갑자기 내 삶에서 마주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비율이 무한대에 가깝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명예' 때문이에요. 여우가 내 삶에 가져온 모든 것으로 인해 나는 여우에게 빚을 졌습니다. 책을 출판하는 것이 그 빚을 갚는 길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출판은 내 안에 있는 작가를 만족시킬 수 있을 뿐, 여우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건 거대한 독자층뿐이지요. 그는 적당한 자부심을 가진 작은 동물이거든요.
나는 독자들의 모든 코멘트를 기억해요. 종종 우리 이야기의 특정한 문장을 언급하기도 했죠. 미국 헌법학자인 로런스 트라이브는 『여우와 나』의 이 구절을 리트윗 했어요.
우리는 자연적 삶에서 멀어질수록 야생동물을 자연적 삶 쪽으로 억지로 몰아붙인다. _319쪽
그가 고른 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생각 중 하나이기도 해요. 인간은 그들의 동물적 본성을 믿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말이에요.
한 재능 있는 스포츠 작가는 나에게 이 구절을 사랑한다고 말했죠.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언가가 어떤 존재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가였다. 며칠 뒤 이 깨달음을 여우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이제 어른이 돼서 뭐가 될 건지 아니? 동사가 될 거야." _336쪽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팟캐스터 중 한 명이 『여우와 나』를 읽으며 영화 〈반지 원정대〉의 사운드트랙을 들었다고 했던 말은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작가님은 당신의 오두막을 둘러싼 환경을 '사막 같은 땅'으로 묘사했지요. 어떻게 그 거친 땅에 머무를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책에서 생텍쥐페리를 인용하며 말했듯 '인간은 어떤 땅보다 메마른 땅에 더 고집스럽게 애착을 느끼'(326쪽)기 때문인가요?
맞아요. 생텍스가 『바람과 모래와 별들』에서 한 그 말은 사실이에요. 거친 땅에서 산다는 건 위험한 일이죠. 위협은 수도 없이 많고, 그리고 늘 일정하게 닥치죠. 이 모든 스트레스는 생리적인 반응을 유발해요.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거죠. 이는 기쁨으로 이어져요. 나는 기쁨이란 아드레날린에 의해 자극되는 감정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아드레날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험악한 곳일수록 사람이 적고 자연을 즐기기 더 쉽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스트레스를 주지만 자연은 정서적 위안을 주지요.
『여우와 나』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살기 힘든 장소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사는 우리가 사람들을 피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이 부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야생의 것들. 지평선 ... (높고 마른 풀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_334, 335쪽
* 괄호 안의 문장은 저자가 인터뷰 과정에서 추가한 것임
『여우와 나』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시점의 변화예요. '나'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은 덕분에 독자들은 검독수리의 시선으로 두 짐승('여우'와 '나')이 너른 언덕을 가로질러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여우의 시선으로 잡초를 뽑는 '회오리손'의 무의미한 몸짓에 웃을 수 있지요. 이 책에서 인간의 시각에서 벗어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대부분의 작가들이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사실이에요. 자연은 인간 서술자가 숭배하거나 혹은 정복해야 할 무언가가 되지요. 나는 자연의 힘에 맞서 싸우는 서술자가 등장하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연의 경이로움에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요. 나는 독자들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더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에게 자연에 대한 내 감정을 가득 담은 책 대신 나에 대한 자연의 감정을 주고 싶었습니다.
자연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영감을 얻을 수 있었죠. 결국, 나는 다른 식물과 생명체의 생사를 결정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로 인해 꾸짖음을 당했죠. 그럴 만도 해요. 나는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난 이후로 인간의 정착 없이 번성해온 공동체에 무작정 침입한 거대 포유류였으니까요.
『여우와 나』는 어떻게 우정을 쌓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공감은 우정의 관문이지요. 나는 다른 생명체들에게 목소리를 주면서 공감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지만 책에서 작가님은 집 앞의 노간주나무에 '진'과 '토닉'이라는 이름을, 작가님을 괴롭히는 까치에게조차 '테니스공'과 '찢긴꼬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죠. 그렇지만 여우는 끝까지 '우리 여우Fox'입니다.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여우가 내 주변을 맴도는 건 관계를 맺고 싶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챘어요. 그래서 그가 떠나길 원했죠.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타입이었고, 까치나 노간주나무와는 달리 카리스마가 있었어요. 전 세계 문명이 여우의 마력을 인정해왔듯 말이에요.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서로에게 헌신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에게 굴복하자마자, 나는 그를 따돌리려고 했어요. 동료들이 야생동물을 인간화하는 행위, 그러니까 인격화를 하고 있다고 나를 비난할까봐 걱정되었죠. 자연사를 가르치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인격화란, 다른 말로 야생동물과 어울리는 행위란 시시하고 쿨하지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그는 나를 다시 유인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를 연구 대상으로서 객관화하려고 했지요. 그를 끝내 '우리 여우Fox'라고만 부른 것은 우리가 친구가 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결과였습니다.
그많은 책들 가운데 여우에게 『어린 왕자』를 읽어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작가님이 좋아하는 『모비딕』이나 『프랑켄슈타인』은 여우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맞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18분의 시간 동안 서로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여우는 그 이상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죠. 나는 그가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요. 무엇보다 그는 내 앞들에 핀 유일한 꽃에 코를 들이밀고 앉아 있기로 결정했으니까요. 그래서 일러스트가 있는 페이지를 펼쳐 그에게 보여주었지요.(그리고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이야기에 여우가 등장한다는 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답니다!)
작가님은 책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개를 준 이유는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에게 기쁨을 주기 위함인 듯하다'(398쪽)는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는 우정에 대한 적절한 정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면서 '소유'가 아닌 '우정'으로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친구와 애완동물(혹은 당신이 소유하거나 허가를 받았거나 임대한 모든 생명체)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유입니다. 자유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명백한 부재나 존재를 말하는 거지요. 애완동물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들은 음식, 주거, 그리고 의료적 보살핌에 있어 주인에게 의존하지요. 그 관계는 동물의 입장에서는 비자발적입니다. 애완동물은 갇혀 있죠. 애완동물이 그 상황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그 상황이 다른 대안보다 더 건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우는 우리 독자들 중 누구보다도 독립적이고 나에게서 자유로웠지요.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생명체와 친구가 되는 것은 몇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당신의 통제를 무력화하고 그들이 음식, 주거, 의료적 보살핌을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당신의 역량을 제한합니다. 통제력의 상실은 사랑과 신뢰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지요.
작가님은 과학자로서 여우에게 인간의 특성을 투영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지요. 과학자로서의 사고방식과 여우의 친구로서의 사고방식은 늘 그렇게 갈등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나는 독자들에게 특정 세계관을 강요하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과학과 직관을 조화시키려 노력할 때, 비로소 더 넓은 그물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야생 여우가 우정을 쌓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격화의 금기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과학에 불충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나는 성인이라면, 그들이 과학자이든 아니든 여우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만큼의 사회적 지능은 가진 부적응자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여우를 만나기 전부터도 나는 자연계에 대한 폭넓은 공감을 쌓아왔어요. 그 공감은 내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이 과학적 방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믿게 했습니다.
나는 지식을 얻는 방법이자 지식의 집합체로서 과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의 범위 안에서 나의 학생들에게 객관의 필요성을 설파하지요. 과학은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가장 밝은 횃불일 수 있지만, 그 빛줄기는 좁습니다. 나는 나의 독자들이 그 좁은 빛줄기를 겨냥할 수 있도록 윤리와 도덕을 발전시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계에 대한 공감을 획득하고 자연을 객관화하지 않을 길고 느린 여행을 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작가님은 "자연은 대자연(Mother Nature)이 아니라 공동체(Community)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들 자연을 '대자연'이라 부르지요. 나는 어머니로서의 자연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걸 개념화할 수도 없고요. 그렇지만 물과 하늘과 산과 그리고 다른 모든 생물들이 들어 있는 풍경은 볼 수 있지요. 자신들의 터전에 있는 생물들의 공동체는 내가 '자연'을 생각할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입니다. 물론, 나의 경우 집 밖으로 나서면 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지요. 인공조명도, 소음도, 아스팔트도 없이 나는 그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특정한 장소가 꼭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건 내 타고난 권리이지요. 나는 동물의 왕국의 일원이며 자연에 속해 있습니다. 한국인인 여러분이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고 해서 한국인이기를 멈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물론, 다른 많은 공동체처럼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 데는 책임과 특권 둘 다가 따릅니다.
그렇다면 자연이 일상의 '도피처'로 그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늘 우리의 터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 없는 것일까요?
도피처라는 생각의 문제는 그것이 일시적인 상황을 암시한다는 것이지요. 나에게 자연은 영원한 집입니다. 그 땅에서의 삶은 내가 다른 더 적절한 장소에 얽히고설키기를 기다리는 동안 머무는 중간 기착지가 아니에요. 황무지와 고요한 공간은 탈출구가 아니라 나의 고향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같지는 않지요. 시골 쥐도 있고 서울 쥐도 있는 거잖아요. 이따금 나는 도시로 퇴각하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를 즐깁니다. 한편으로, 좀 더 열린 나라로 망명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느 곳이 집이고 어느 날이 휴일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선택을 하니 그걸로 유난 떨지 말기로 해요. 우리는 오며 가며 서로 마주칠 겁니다.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호의적일 거라 믿어요.
슬프게도 오늘날 미국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시골 사람인지 도시 사람인지 여부가 사회적, 정치적 혼란과 적대감의 근원이 되고 있지요.
『여우와 나』의 한국어판 부제는 '한없이 다정한 야생에 관하여'입니다. 물론, 야생이 항상 다정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이 책이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감각을 일깨우고 있다는 생각에 제목을 이렇게 지어보았습니다. 작가님은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기를 바라시나요?
자연은 물론 항상 다정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그게 사실이죠. 그렇지만 인간 중심의 세계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자동차와 알코올과 약물, 그리고 성병을 만들어냈지요. 이 모든 것들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인간은 강탈하고 강간을 합니다. 우리는 살인범이고 방화범이지요. 여전히, 우리는, 우리 대부분은 인류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인류애가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라 믿으며 노력하고 희생합니다. 그리고 미래 세대에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리라 믿으며 전쟁에 나가 죽지요. 다른 말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비열하고 질투가 많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연이 항상 안전한 건 아니지만, 여기에 자연과 인간 중심 세계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도를 가지고 당신의 삶을 무너뜨리며 그것을 즐깁니다. 자연 역시 당신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그것은 늘 우연히 일어나며 회한을 남기지요.
나는 한국 독자들이 그들의 작은 나라가 위대한 호랑이의 집이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우가 나의 땅의 마법이자 영혼이었던 것처럼 호랑이도 한국의 영혼이죠. 호랑이를 한국 땅에서 데리고 나갈 수는 있어도 한국이 호랑이의 정신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예요.
*캐서린 레이븐(Catherine Raven) 캐서린 레이븐은 1959년생으로 미국의 몬태나 대학교에서 동물학 및 식물학을 공부했고, 몬태나 주립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글레이셔, 레이니어산, 노스캐스케이즈, 보이어저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레인저로 활동했으며, 〈아메리칸사이언티스트〉, 〈저널오브아메리칸멘사〉, 〈몬태나매거진〉에 자연사 에세이를 기고했다. 레인저로 일하며 야생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 그녀에겐 후진도 안 되는 낡은 자동차 한 대, 그리고 기본적인 캠핑 장비가 전부였다. 이 책은 로키 산맥 자락의 인적 없는 땅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살던 그녀가 야생 여우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으며 시작된다. 오두막 근처 여우 계곡에 가면 그녀가 진창에서 회전초를 뽑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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