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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의 오늘 밤도 정주행] <로스트>, 나의 첫 번째 미드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0월호
나는 <로스트> 시즌1을 단숨에 정주행했다. 한 에피소드만 보려고 했던 계획은 별 저항도 없이 쉽게 무너지고, 다섯 에피소드를 연달아 본 후에야 '아, 더 이상 보는 건 너무 백수 같아서 안 되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드라마에서 억지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써야했다. (2022.10.13)
가장 첫 번째로 본 미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로스트>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로스트>는 내가 첫 번째로 본 미드가 아니다. 내 미드 시청의 역사는... 돌이켜보면 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말 저녁 티브이에서 <600만불의 사나이>나 <소머즈>를 방영해 주던 시절이 있 었다. 일요일 오후에 우리 가족은 둘러앉아서 <레밍턴 스틸>을 보곤 했다. <케빈은 열두살>과 <코스비 가족>을 챙겨 보았고, 더 자라나서는 <베버리 힐스의 아이들>을 열심히 보았다.(그 당시에는 그걸 보지 않으면 친구들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
<로스트> 이전에 본 미드는 더 있다. <윌 앤 그레이스>와 <프렌즈>, <퀴어 애즈 포크>, <길모어 걸스> 기타 등등. 사실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트>는 나의 첫 미드처럼 느껴진다. 한동안 나는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다. 그 궁금증은 '첫 번째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로스트> 시청과 다른 드라마 시청 사이의 차이점이 있었다. <로스트>를 공중파 방송국에서 방영해 줄 때에는 흥미가 없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공중파에서 해주는 각종 프로그램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보게 된 건, 당시 내가 100% 신뢰하던 친구의 추천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사실인데, 나는 다른 사람의 추천을 따르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이건 나의 여러 가지 단점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는 <로스트> 시즌1을 단숨에 정주행했다. 한 에피소드만 보려고 했던 계획은 별 저항도 없이 쉽게 무너지고, 다섯 에피소드를 연달아 본 후에야 '아, 더 이상 보는 건 너무 백수 같아서 안 되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드라마에서 억지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써야했다. 이제 이 유명 한 드라마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겠지만(아닌가, 요즘 20대들은 모르려나!), 그래도 이 글이 미드 소개의 목적을 지니고 있으니까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해보면,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과거에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고, 그러한 과거로 인해 현실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결하던 사람들 사이에 서서히 갈등이 일어나고 편이 갈라져 반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로스트>가 이런 생존기나 갈등만을 다뤘다면, 내가 그런 식으로 하루 만에 에피소드를 다섯 개씩 해치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스트>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드라마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다음 에피소드의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 이 섬에 북극곰이 있는 거지? 죽었다고 한 사람이 어째서 살아 있는 거지? '검은 연기'의 정체는 무엇이지? 음식은 누가 보내 주는 거지? (나중에 밝혀지는) 달마 이니셔티브는 뭐지? 그들은 왜 저런 실험을 하는 거지?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라는 대사의 의미는 뭐지?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 식으로 연결이 되는 거지? 시공간은 어떤 식으로 변형되는 거지? 저 사람들은 왜 저기에 있는 거지? 저 단어의 뜻은 뭐지? 전 시즌을 보는 내내 이런 궁금증은 끊이지 않는다.(그 당시 내 일기에는 <로스트> 관련 꿈까지 꿨다고 적혀 있다) 작가진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와 세계관은 양자 역학, 평행 우주, 불확정성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밝혔고, 실제로 드라마상에 (실제 과학자의 이름을 딴) 패러데이가 등장하거나(흄, 로크의 이름을 딴 등장인물도 있다) 양자 역학에 대한 언급을 하기도 한다. 나는 과학에는 완전히 문외한이고 관심도 없었지만, 순전히 이 드라마를 이해하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과학책을 빌려서 읽거나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다.
팬들은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수많은 해석을 내놨다. 그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불시착한 섬이 평행 우주에서의 뉴욕 맨해튼이라는 설이었다. 나중에 과거 시간대(1977년)에 속하게 되는 등장인물들이 폭탄을 터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1977년 뉴욕 대정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를 흥미롭게 만든 부분은 바로 그러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드라마의 내용과 실제 현실이 만나는 것. 창작물 속 하나의 장면이 창작물 바깥으로 도약하고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 물론 제작진이 이러한 수많은 궁금증에 대한 해소를 적절하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시즌6, 그러니까 마지막 에피소드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로스트>의 매력은 과학 지식에 의거해서 수수께끼를 푸는 것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열광하게 했던 요소는 조금 더 근본적인 수준에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양자 역학이 작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 한 적이 없다. 빛은 파동이며 입자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그것이 끈이론이든, 막이론이든, 그 무엇이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양자 역학에서 시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과는 다르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양자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자신의 책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열이 있을 때만 발생한다고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이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편지의 구절을 소개한다.
미켈레는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이 기이한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처럼 물리학을 믿는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하는 것이 고질적으로 집착하는 환상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에 실제로 작동하는 물리 원칙을 드라마에 녹여내며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방대한 포부를 밝힌 드라마는 <로스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다. 제작진은 드라마의 그 모든 떡밥을 회수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로스트>의 전 시즌을 보는 동안 우리는 충분히 이 세계가 존재하는 모양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로스트>에서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시즌4의 5화이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데스몬드는 섬을 떠나다가 부작용으로 '의식'의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과거의 시간대에서 만난 패러데이는 임의적이고 무질서한 변수들 사이에서 불변의 수를 찾아야 한다고, 과거나 미래의 시간대 모두에서 데스몬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지 못하면, 그의 의식은 과거와 현재를 점프하다가 결국 뇌에 문제가 생겨 죽게 되리라고. 이때 패러데이는 '닻(anchor)'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나에게 여전히 소중하고 지키고 싶은 무엇. 나를 나 자신으로서 정박시키는 닻. 나를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건, 그런 식으로 내 인생에 걸쳐 소중한 게 무엇인지 되새기는 활동인지도 모른다.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데스몬드는 그것을 찾아낸다. 이 글을 쓰다가 지금 그 에피소드를 다시 보고 왔는데(이게 몇 번째 시청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봤는데),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눈물이 날 뻔한 건 내 기준에서는 눈물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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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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