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기다립니다] 임지현 선생님께 - 이소영 교수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0월호
세련된 발음과 주례사적인 표현들로 매끄럽게 단장된, 그렇지만 막상 주장하는 내용은 초학인 제가 느끼기에도 안이했던 몇몇 발표들과 달리, 동유럽 및 동아시아 기억 전쟁의 전개 양상에 대한 선생님의 주장은 미사여구 없이 명료하고 적확했습니다. (2022.10.07)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적고 나서, 이어질 문장을 고민하며 썼다 지우길 반복했습니다. 이메일도 서간의 한 형태라 본다면 이 글이 선생님께 드리는 첫 번째 편지는 아니지요. 사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절반 가량은 제가 신진 연구자였을 때, 선생님이 소장으로 계시던 연구소에 재직하며 쓴 업무 메일일 것 같습니다. 국제 학술 행사 프로그램 초안을 검토받고, 트랜스내셔널 여름 인문 학교 일정을 조율하고, 팀 티칭 교과 운영을 상의 드리는, 그런 메일이었지요. 나머지 절반은 선생님께서 제 연구 주제와 관련된 흥미로운 논문과 기사를 찾아 보내주시거나, 혹은 제 쪽에서 선생님께 조언을 구한다는 빌미로 '저, 공부가 이만큼 진척되었어요' 슬며시 내보이고픈 마음을 담아 보낸 메일이었고요. 그런데 '임지현 작가님의 새 책을 기다립니다'라는 제목의 공개 서한이라니. 숨고 싶어집니다.
좋아하는 저자에게 독자가 띄우는 편지 형식의 기획인지라 조심스러웠습니다. 제게 선생님은 '작가님'이기 이전에 '선생님'이니까요. 혹여나 불편해하시면 어쩌지 걱정도 되었고요. 군더더기 없고 강단 있는 선생님의 문장과 달리 제 문장은 마가린 듬뿍 발라 구운 식빵 같다는 걸 스스로 알기에, 감상적으로 흐르기 쉬운 서간체의 글쓰기는 더욱 저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안을 수락할 용기를 낸 것은 편집장님께 기획 취지를 들으며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가 떠올라서였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한나 아렌트, 심지어 당신을 처음 폴란드 연구로 이끌었던 로자 룩셈부르크를 수신인으로 하여 도발적이고도 애정 어린 공개서한을 보냈던 선생님이시니, '이소영 선생'이 선배 연구자께 전하는 이 편지 또한 너그러이 받아주시리라 희망해 봅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읽은 제가 지금 기다리는 새 책은 선생님의 신간이 맞으니까요.
십수 년 전 가을 이맘때였습니다. 대학원생으로서 처음 참여한 국제 학술 행사였고, 주제는 '동아시아의 기억과 연대'였지요. 학회 첫 세션 도중, 청중석의 어느 학자가 발언권을 구한 뒤 폴란드 사례를 들며 발표 내용에 대한 반박 의견을 내었지요. 그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와 『우리 안의 파시즘』을 논한 그 역사학자 임지현임을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 날엔 선생님의 발표도 들을 수 있었어요. 세련된 발음과 주례사적인 표현들로 매끄럽게 단장된, 그렇지만 막상 주장하는 내용은 초학인 제가 느끼기에도 안이했던 몇몇 발표들과 달리, 동유럽 및 동아시아 기억 전쟁의 전개 양상에 대한 선생님의 주장은 미사여구 없이 명료하고 적확했습니다. 그날 밤 은사님들께 안부 메일을 쓰며, 오늘 이곳 학회에 가서 이런 학자를 뵈었다고, '저도 그렇게 성장해 가고 싶습니다'라 적었습니다. 풋내기의 치기이긴 했지만 진심이었습니다. 법문학을 주제로 공부해 오던 제가 법사회사로 관심을 확장하고, '법을 통한 과거 청산'의 문제와 사회적 기억에 천착하게 된 계기가 그것이었으니까요.
그날 학술 대회에서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소재 중 하나가 바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서문에 등장한, 「요코 이야기」를 둘러싼 논쟁의 지형도였습니다. 패전 직후 한반도 북부에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일본인 일가의 고초를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묘사한 「요코 이야기」는 가해 국가인 일본을 희생자 위치에, 피해 국가인 한국을 가해자 위치에 각각 세운 점에서 대단히 문제적이었지요. 선생님은 이 논의가 어느 경로로 어떤 주체들에게서 제기되고 점화되었는지 추적하며, 민족주의적 상상이 트랜스내셔널한 담론 공간에서 다른 민족들과의 비교를 전제하여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가해 국가의 개인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가'의 화두를 파고드는 한편, 「요코 이야기」의 서사가 탈역사화와 과잉 역사화의 문제를 동시에 갖고 있음을 비판하셨고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거기서 출발하여, '후속 세대들이 앞 세대가 겪은 희생자의 경험과 지위를 세습하고, 세습된 희생자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의 민족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기억 서사'가 만들어지는 기억 정치를 해부합니다. 피해자 위치 점하기를 강조하는 민족주의가 어떻게 고통의 크기를 두고 경쟁하는 집단들 간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통해 견고해지는지도요.
이번에 책을 다시 읽으며, 용서의 폭력성과 정치성을 다룬 단락 서두의 랍비 일화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상대방이 고매한 종교인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모욕을 가했던 상인이 되돌아와 랍비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는 용서하기를 거절합니다. 랍비의 아들이 '누군가 세 번 이상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야 한다'는 율법을 상기시키자 랍비가 이렇게 답하지요.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기차 안에서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아니라 어느 이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셈이지. 그러니 나 말고 그 이름 없는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게 옳다."
639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제가 그간 학회나 워크숍에서, 혹은 업무 회의나 식사 자리나 지하철 안에서 선생님께 들어온 수많은 사례들과 예시들이 열한 개의 단락에 켜켜이 담기어 정교한 이론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말은 언젠가는 흩어져 휘발되지만 책은 남겨져 읽힐 테지요. 다음 신간을 벌써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연구의 시작점이었을 바르샤바에서 선생님은 지금 마지막 연구 학기를 보내고 계시지요. 저는 독일의 한 대학 도시에서 첫 연구 학기를 지내는 중입니다. 폴란드사를 들여다보겠다는 젊은 한국 역사학자를 자신들의 공부 집단 안으로 들여 많은 걸 가르쳐준, 이젠 세상에 없는 선배 역사가들을 회상하며 말씀하셨죠. 언젠가 선생님도 저에게, 선생님이 지금 그 '폴란드 노장 좌파 역사가들'을 기억하시듯, 그렇게 기억되면 좋겠다고요. 역사학 전공자가 아닌 '법순이'가 선생님 곁에서 연구할 수 있던 시간들은 제 공부에 마법 같은 흔적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래 봤자 제가 다루어본, 혹은 다룰 수 있는 분야는 기억 연구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요. 선생님의 발표를 처음 들었던 그날의 포부처럼 '그런 연구자로 성장하는' 일은, 시간이 흘러 제가 중진이 되고 원로가 되어도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임을 알아요.
도식화하여 말함이 허락된다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이들 가운데는 자기 심연으로부터 길어 올린 어둠에서 영감을 찾고 창작의 힘을 얻는 부류가 있는 한편 자기 내면의 빛을 끌어내어 그걸로 고유한 감성을 빚어내는 부류 또한 존재하는 듯합니다. 지휘자 필리프 헤레베헤와 사이먼 래틀이 후자, 그러니까 빛의 예술가에 속한다고 느껴왔는데요. 둘 중 헤레베헤의 곡 해석은 내면을 정갈히 비움으로써 투명한 외부의 빛이 여백을 채워가는 인상을 주는 반면, 래틀의 경우는 반대로 태양처럼 강렬한 자아로 반짝이는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왜일까요. 래틀의 지휘를 보고 들을 때면 저는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비록 취중에 즐겨 부르시곤 하던 노래 <봄비>의 음감은 음... 실망스러웠지만요.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두고 래틀은 이렇게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역사 속 이름 없는 한 사람의 죽음 제의로부터 출발하여, 그가 고통과 환희를 겪으며 생으로써 투쟁해 온 자신만의 무언가를 껴안고서 마침내 세상 너머로 넘어가는 여정을 그려낸다고요. 재능의 문제만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으로도 저는 래틀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중에서도 더 작은' 부류입니다. '카리스마'란 단어가 제일 안 어울릴 사람을 하나 꼽으라 하면 그건 저일 테니까요. 래틀이 은빛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아름다운 음률을 이끌어낼 동안 저편 구석에서 바이올린도 첼로도 아닌 심벌즈를 손에 쥐고 이걸 언제 치면 되나 싶어 지휘자의 손끝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그 연주자가 저일 테니까요. 그러다 실수 없이 제대로 소리를 내면 신난 나머지 마음속에서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고 크레파스 병정들이 나뭇잎을 타고 노는' 게 저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훗날 언젠가 세상 너머로 건너갈 때, 제 공부 안에 선생님이 새겨 넣어주신 기억 연구의 조각들이 반짝이고 있기를요. 이게 제가 '생으로써 투쟁해 온 무언가'라고, 신께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해요. 그 조각들이 더 밝고 크게 그리고 또렷하게 다듬어져가는 오늘과 내일과 그다음 날들을 살아가겠습니다.
이소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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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별것 아닌 선의』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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