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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누리의 소녀 등장] 정체성 : 존재와 본질로서의 소녀

소녀, 少女,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여자아이",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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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기쁘게 사랑에 빠지고 마는 나에게 마치 이세계의 주인공처럼 "짜잔, 우아하게 등장"해버리는 소녀들을. (2022.09.20)


『한여름 손잡기』의 권누리 시인이 좋아하는 '소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껏 달리는 '소녀'들을 만나보세요.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 시기까지의 나는 '사랑하지 않기'를 스스로 학습하며 자랐다. 사랑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슬퍼 보였고, 위태롭게 느껴졌다.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 낮이며 밤 동안 거리의 풍경, 친구들 이야기,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보고 읽은 사랑은 나에게 의문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꼈던 사랑을 뒤늦게 '그거 사랑이었구나!'하고 깨달으며 얼렁뚱땅 해결됐다. 고백한다. 나는 거대한 우울과 위협적인 나태를 느끼기 이전에 이미 사랑을 알았다. 유치원에서 늘 짝꿍하고 싶었던 친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일러문과 웨딩피치, 천사소녀 네티, 빨간망토 차차를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소녀'들을 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떤 단어나 개념, 용어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정의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거나, 깨부수거나, 해체하는 데 생애를 바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소녀'에 대해서라면 꽤 오래 생각하고 사랑해왔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소녀들이 있다. 그렇다면 소녀는 태어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길러지게 되듯' 소녀 정체성 역시 학습과 경험, 자아 정체성 속에서의 유영과 도전, 방황과 용기로써 자의·타의적으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어떤 여성은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여자아이' 시기를 보내지 않고 '여성'이 된다. 누군가는 소녀인 채로 평생을 살아가며 소녀로서 생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사회에서 소녀적인 것은 쉽게 멸시된다. 벗어나야 하거나, 반드시 벗어날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것은 소녀의 정의에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이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1) 행동하는 인간 존재를 바라며, '인력'으로써의 생산성을 기대한다. 또한 '소녀'는 '어린 여자아이'를 표현하기 때문에 쉽게 대상화되며 소녀들의 '주체성'을 삭제해버리기도 한다. '소녀'를 생애 주기 중 한 시기인 동시에 하나의 '정체성'으로 바라보자면, 사회에 '잘' 적응하지 않기를 선택하거나 (혹은 적응하지 못하거나) 타인의 시선에서 사회 바깥의 존재처럼 느껴지는 모든 사람들은 '소녀'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생애의 일부를 '소녀'로서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여성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여성'이 '소녀 시기'를 경험했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진다. 소녀는 이렇게 경험과 정체화를 통해, 연령과 젠더, 취향과 성향을 교란한다.

돌아와서, 나는 특별히 이상적이거나 이상화할 만한 생애 주기 상 소녀기를 보내지 않았고, 동시에 여전히 나를 제도가 규정하는 '어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건 내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하고, 그만큼의 보수를 받고, 학습된 사회성으로 타인과 비-언어적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으며, 질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예약한 뒤 내원하고, 세금과 요금, 보험료와 휴대폰 요금을 제때 내는 것과는 또 별개의 문제다.

언젠가 친구와 '우리는 영원히 어른 여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격식을 잃지 않으면서 여유를 놓치지 않는 기품, 생활력과 경제력을 갖춘 데서 나타나는 복식, 깔끔하고 청결한 차림새, 세련되고 고상한 품위, 포용적이면서 너그러운 태도, 어쩌면 완전히 반대로 엄격하고 단호한 말투. 내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일부는 그렇고 몇은 '완전히'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소녀적'인 것들은 무엇일까. 내가 말하고 싶은 소녀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소심함을 가지고 꿋꿋하게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몰아붙이는 다정한 힘과 용기, 입고 싶은 것을 입는 일, 자신과 타인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기꺼이 사랑하기, 저질러버리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태도, 빛나는 결연함, 충동적으로 느껴지는 선택, 미래의 있고 없음, 바닥과 천정을 오고 가는 우울함과 행복, 정동의 규칙 없음, 이따금 내 것과 네 것을 나누면서도 가진 것을 모두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모함...

몸과 마음이 '성숙한 어른'이 되지 않거나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들은 그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만으로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덧붙여,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거부, 저항, 대항, 대응을 하게 된다. 망치, 드라이버, 마법 지팡이, 액세서리, 립스틱과 틴트, 라이터와 휴대용 삼각대로 세계의 부조리를 잘근잘근 부수는 소녀들에 대해 나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기쁘게 사랑에 빠지고 마는 나에게 마치 이세계의 주인공처럼 "짜잔, 우아하게 등장"(2) 해버리는 소녀들을. 제도와 폭력, 차별을 공고하게 만드는 식으로 대상화되면서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지키고 확산하기 위해 꾸준히 '소녀'를 잃지 않는 환하게 빛나는 소녀들에 대해서 말이다.



(1) 1) 동사 '성숙하다' 2)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되다. 표준국어대사전

(2) 
"시간은 많아 이대로면 아마 영원히 살 수 있지 않을까 안녕 나의 주인공 그래 너를 만나러 나 짜잔 우아하게 등장!"  _'이지금'(아이유, 앨범 <Palett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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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누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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