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다영 "시를 쓸 때 비로소 내가 된 것 같아요"
『스킨스카이』
타인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편이에요. 다만, 저의 시를 좋아해주는 분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쓰죠. 저에게 소중한 걸 내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2022.09.19)
성다영의 시집 『스킨스카이』는 낯설다. 제목 없는 표지, 여느 한국 시인선의 두 배에 달하는 두께도 그렇지만 진짜 '낯섦'은 시집을 펼쳤을 때 드러난다. 큰 글씨와 작은 글씨, 두 가지 버전으로 시가 인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글씨의 크기만 바꿨을 뿐인데 같은 시가 다르게 보인다. 큰 글씨는 어딘가로 외쳐야 할 선언문 같고, 작은 글씨는 익숙한 문학 같다. '세상에는 작은 걸 보기 힘든 사람도 많은데 어째서 책의 글씨 크기는 모두 비슷한 걸까?' 성다영은 이 의문을 품고 물리적 장벽을 겉으로 드러내 오히려 허무는 시도를 했다. 이 '낯섦'은 시의 형식에만 머물지 않고 그 너머를 보게 만든다. 덕분에 『스킨스카이』는 시집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됐다.
드디어 시집이 출간됐어요.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시인님의 시집을 기다렸을 거예요.
정말요?(웃음) 저도 시집이 나오기를 정말 기다렸어요.
시집을 마주한 소감이 어때요?
뿌듯해요. 3~4년 전부터 썼던 시가 하나로 묶여서 나온 거니까요. 기쁨으로 치자면 시를 한 편 썼을 때가 훨씬 좋아요. 시를 완성한 순간은 진짜 기쁘거든요. 반면, 시집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완성됐기 때문에 말 그대로 '드디어 나왔구나!'라는 느낌이죠.
대부분의 시가 큰 글씨와 작은 글씨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어요. 시집의 물리적 장벽을 허물기 위한 시도였다고요.
문학 독자가 모두 젊은 건 아니잖아요. 나이가 많거나, 시력이 좋지 않아서 작은 글씨를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 책은 특정 나이대의 시력이 좋은 사람을 겨냥하고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글자의 크기를 키운 채로 시를 프린트해서 봤는데,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전혀 다른 시처럼 읽히기도 하고요. 작은 글씨가 본래의 문학적인 느낌을 가진다면, 큰 글씨는 굉장히 낯설고 직물처럼 다가왔죠. 소위 문학적이지 않은 느낌이 너무 재밌었어요. 물론, 이 시도가 시각 약자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이런 형식을 고집한 건, 책이 가진 물리적 장벽을 환기하기 위함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나요?
아버지 덕분이에요. 등단을 한 뒤, 문예지에 시가 실리면 부모님께 보여드리곤 했거든요. 하루는 저희 아버지께서 문예지는 글씨가 너무 작아서 보기 힘들다면서 "나중에 네 시집은 글씨를 크게 넣어서 양장으로 멋있게 만들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 당시에는 시집의 형식이 정해져 있어서 바꿀 수 없다고 대꾸했는데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 말이 머리에 맴돌았어요.
사실 처음 계약한 출판사에서 출간이 무산되었는데요. 이 형식을 받아들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시집 계약을 해지하는 건 엄청난 결정이잖아요. 하지만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꼭 이런 형식으로 시집을 출간하고 싶었죠. 출판사에서 우려했던 바와 달리 독자들은 이걸 너무 자연스럽게 봐주셔서 신기해요. 우리나라 독자들이 문학의 미학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는 수준이 굉장히 높다는 생각이 들어요.
'봄날의 책' 출판사에서는 어땠어요?
흔쾌히 받아들여 주셨어요. 정말 대단한 출판사예요(웃음). 이외에도 여느 시집들은 형식이 고정되어 있잖아요. 표지나 제호, 판형도 정해져 있고요. 하지만 '봄날의 시집'은 표지 그림이나 종이까지 섬세하게 고를 수 있어서 시를 표현하기에 더 좋은 느낌이에요. 앞으로 봄날의 책에서 펴낼 시인선이 진심으로 기대됩니다.
표지 그림과 시가 짜맞춘 듯 잘 어울려요.
표지 이미지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제 시 창작 세미나를 들었던 수강생 중 한 분이 그림책을 출간했다고 책을 선물해 주셨어요. 거기 실린 그림이 너무 예뻐서 "이 그림들 중 하나를 표지로 써도 되겠냐"고 물어봤죠. 그때가 출간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거든요. 일정이 빡빡했는데도 그분이 표지 그림을 새로 그려주셨어요. 제가 그림에 대해 요청한 건 하늘과 나무가 꼭 있으면 좋겠고, 그게 하늘인지 나무인지 아니면 꽃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으면 한다는 거였는데요.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나왔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큰 글씨, 작은 글씨 버전 모두에서 「잔디활착」, 「사랑의 에피파니」의 순서는 고정되어 있어요. 맨 처음과, 맨 마지막으로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대하기 어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시 창작 수업을 하거나 외부에서 사람을 만날 때, 무섭고 냉철해 보이는 이미지를 가졌다는 말을 더러 들었거든요.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첫 번째 시는 귀여운 느낌의 「잔디활착」을 넣었어요(웃음). 제가 추구하는 시의 느낌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요. 「사랑의 에피파니」를 마지막에 넣은 건 결국 이 시집에서 말하고 싶었던 게 사랑이기 때문이에요.
사랑이요?
제가 시 창작 수업을 할 때 늘 하는 말이 있는데요. 세상을 살면서 문제라고 느끼는 점이 있거나, 슬프고 우울한 게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거예요. 이유를 깊숙이 파고들수록 시에 날카로운 구석이 생기거든요. 이때 사랑 없이 비판만 하면 절대 안 돼요. 요즘은 희망이 없다는 말이 흔하게 들리는데요. 사실 비관은 너무 쉬워요. 그럼에도 희망을 비추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시는 그 빛을 꼭 비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사랑이고요. 비단 인간과 인간의 사랑뿐 아니라 모든 걸 초월하는 사랑 자체요.
인간 사회가 규정하는 '인간'에 대한 생각을 깨뜨리는 시도들이 많이 보였어요. 시집을 읽는 내내 묻고 싶더라고요. 인간으로 사는 게 어떤가요?
너무 싫어요. 괴롭고요. 가끔은 세상의 모든 게 야만적으로 느껴져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프고,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비건(Vegan)'이라는 정체성도 이번 시집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어요.
벌써 비건이 된 지 5년 정도 흘렀네요. 저는 그 이후로 더 행복하고 자유로워졌어요. 먹지 않거나, 하지 않는 행위가 많아져서 부자유스러워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제가 '성다영' 자신이면서, 동시에 인류라는 이 모순을 비거니즘 운동으로 종합할 수 있었거든요. 저는 무한한 시간 속에 있는 순간적인 존재예요. 다른 무언가와 비교했을 때 제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죠. 그런 제가 다른 존재를 죽이면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물론 살아있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해를 끼치는 일이 발생할 테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건 진정으로 아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 비건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같아요. 시인이 되기 전에 비건이 먼저 되어서 참 다행이죠.
원래 화학을 전공했다고요. 어떻게 시를 쓰게 됐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잠시 회사에 다녔는데 잘 안 맞았어요. 그래서 문창과에 다시 들어갔죠. 처음에는 소설을 썼어요. 그러다 김혜순 시인님 수업을 듣게 됐는데, 선생님이 저를 시 쓰는 사람으로 알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어느 날 제가 "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요?"라고 질문했더니 선생님이 "너 원래 잘 쓰잖아"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시랑 잘 맞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점점 더 시를 많이 쓰게 되고, 쓰다 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퇴를 하고, 1년간 계속 시만 썼어요.
2019 경항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지만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작품 수록을 거부했어요. '#문단_내_성폭력' 가해자가 기획이사로 있던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이라는 이유로요. 시(詩)전문지 <시와 함께> 편집부로부터 '좋은 시를 기대하겠다'는 청탁 메일을 받고는, 편집주간의 성추행 기사를 재조합해 시를 써서 보낸 뒤 그 시를 트위터에 공개했죠. 대단한 용기예요.
비유를 하면 이렇죠. 제가 어느 집을 사서 막 이사를 했어요. 그럼 집이 있는 건물이 깨끗했으면 좋겠고, 함께 사는 이웃들도 좋은 사람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잖아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앞으로 내가 계속 살아갈 곳이니까, 깨끗하게 만들어야죠. 지저분한 건물에 나쁜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더는 그 집에 살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건 더러운 집에 계속 살고 싶어 하는 것과 같잖아요. '아무도 치우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도 해야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트위터에 공개한 「좋은 시」 본문에는 특정인의 이름이 들어갔지만, 시집에 수록된 「좋은 시」는 날짜와 이름이 가려졌어요. 네모 사각형으로 특정 부분을 지운 건 시인님의 아이디어였나요?
원래 기호로 가리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는데요. 검열의 느낌을 주고 싶어서 네모 박스 처리를 했어요. 과거에는 까만 줄로 문구가 지워지는 등의 검열을 당하기도 했잖아요. 지금도 표면적으로는 검열이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제재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시작 노트에 쓴 것처럼, 특정인의 이름을 넣었다면, 출판 가처분 신청을 당하거나 사실적시 명예 훼손죄로 기소될 수도 있었을 테죠. 이 자체도 엄밀히 말하면 검열이잖아요. 그런데 날짜와 이름을 가리니까 더 재미있는 시가 된 것 같아요. 처음 시가 특정한 한 명을 지칭했다면, 지금은 어느 누구라도 그 박스 안에 들어갈 수 있죠.
식물 상점 'Q.E.D'를 운영하고 있어요. 시에 식물이 자주 등장하는 편인데, 상점을 운영하는 게 시 쓰기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예전에는 식물을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를 썼어요. '식물에게도 낮과 밤이 있겠지, 줄기를 꺾으면 아프겠지'처럼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식물을 생각한 거죠. 그래서 막연한 느낌을 뭉뚱그려서 표현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떤 식물을 등장시킬 때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쓰게 돼요. 인간 중심적으로 식물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게 가장 큰 차이인 것 같아요.
「붏갋늫핝 싫」, 「시 는 읽 로 으 앞 서 에 뒤」 등 의도적으로 형식이나 맞춤법을 망가뜨린 시도 인상 깊었어요. 형식을 파괴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데 관심이 있는 편인가요?
어떤 형식에서 재미를 느끼면, 그걸 단순히 시에 차용하기 보다 그 형식이어야만 하는 내용을 시에 담으려고 노력해요. 단순한 언어 실험으로 끝나는 시는 공허하게 느껴지죠. 저는 시를 쓸 때 타인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편이에요. '이런 말을 쓰면 누군가는 상처받겠지' 같은 생각은 별로 하지 않거든요. 다만, 저의 시를 좋아해주는 분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쓰죠. 저에게 소중한 걸 내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언어 실험이라는 말로 포장된, 의미 없는 시를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건 독자의 시간을 버리는 거잖아요.
시인의 말이 떠오르네요. "이것을 읽는 동안 시간이 흐른다"고 썼죠. 이 문장을 읽고 '독자를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시를 읽는 동안 진정한 시간이 흐르는 경험을 느끼게 하고 싶어요. 세상에는 쓸데없는 게 너무 많잖아요. 자극적이고,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정보를 담은 인터넷 게시물이나 기사를 볼 때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걸 보는 순간에도 시간이 흐르지만 진정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죠. 또, 세상은 늘 반복되잖아요. 매일 똑같이 흐르는 반복을 깨고 새로운 틈에서 시작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시를 쓰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자유의 행위 또는 자유를 실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유로운 행위를 할 때 비로소 제가 된 것 같죠. 시 쓰기가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이유예요. 자유란 삶의 보편적인 가치와 규범을 따르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법적인 질서'를 정의와 자주 혼동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법에 의거해 죄가 없는 상태가 아니에요.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가는 운동을 할 때 자유에 가까워지죠. 제가 시를 쓰는 건 그런 의미예요.
*성다영 201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유기견 '오디'와 함께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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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자신을 분류하고 규정하고 전유하고 지배하려는 언어와 불화하며, 그 "사이"에서 시를 쓴다. 성다영의 시는 바로 그러한 간극에서 생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시"인 동시에, "나는 내가 쓰는 시보다 가치 있다"는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시인은 시를 물화하기를 거부하고 시로도 환원될 수 없는 삶의 편에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