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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의 오늘 밤도 정주행] 살아남는다는 것 - <해피 밸리>
<월간 채널예스> 2022년 9월호
어쩌면 중요한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기계적으로 대하는 것. 시체를 앞에 두고도 자신의 별명을 궁금해하는 것, 그저 일상의 어떤 사소한 부분을 파고드는 것. (2022.09.08)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케이트 윈슬렛을 잘 모른다. 아, 물론 케이트 윈슬렛을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가 나오는 작품은 본 게 거의 없다.(혹시나 해서 필모그래피를 확인했더니 두 개 있긴 하다. <데이비드 게일>과 <이터널 선샤인>) 그러니까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은 내가 본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세 번째 작품인 셈이다.
이 드라마에서 '메어'로 분한 그녀는 내가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는 좀 달랐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은) 동쪽 마을의 경찰인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 있고 항상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눈가에는 거친 주름이 보인다. 몸이 크고, 입은 걸다. 어머니와 딸,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데, (놀랍게도) 전남편과 전남편의 (결혼을 앞둔) 애인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좋은 이웃인 것처럼 지낸다) 그녀는 일이 끝나고 오면 신발을 신은 채 식탁 위에 발을 올리고 맥주를 마시며, 툴툴거린다. 옷은 아무 데나 던져 두고 발로 집는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가족들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한다. 이런 장르의 드라마가 언제나 그렇듯이,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고 마을은 두려움과 의심으로 뒤덮인다. 메어는 범인을 찾아 나선다.
이 드라마를 보다가 영국 드라마인 <해피 밸리>를 떠올렸다. 여자 경찰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두 드라마는, 작은 (그리고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에서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메어와 (<해피 밸리>의 주인공인) 캐서린 사이에는 꽤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일단 둘 다 언제 나 툴툴거린다. 둘 다 자식이 자살을 했고 죽은 자식의 환영을 보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자살한 자식(메어는 아들이, 캐서린은 딸이 죽었다)의 자식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보다 <해피 밸리>의 설정이 좀 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음... 좀 더 잔인하다.
왜냐하면 캐서 린의 딸은 강간의 결과로 임신과 출산을 한 후 자살했기 때문이다. 메어는 자신의 손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캐서린은 자신의 손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캐서린은 손자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딸을 죽인 거나 다름 없는 범죄자를 떠올리고 괴로움에 사로잡힌다. 그러므로 캐서린은 메어 보다 좀 더... (이번에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절망적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동안, 메어는 새로운 사람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어하게 된다. 처음에는 달갑지 않게 여기던 심리 상담에 성실하게 임하고, 자신을 죽도록 증오하고 자살해 버린 자식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메어가 어렸을 때, 남편을 잃은 후 한동안 그 분노를 딸에게 풀었던 메어의 어머니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딸에게 그 시절의 일들에 대해 사과한다. 메어가 대수롭지도 않게 엄마를 용서한다고 말하자, 메어의 어머니는 말한다.
"다행이구나. 난 오래전에 날 용서했거든."
그리고 울음을 터트린다.
"내가 너에게 바라던 게 그거란다. 너 자신을 용서해 주렴. 케빈에 대해 말이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캐서린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생각도 없고 남을 용서할 생각도 없다. 메어처럼 상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가지만 캐서린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거기에 응한 적이 없다. 드라마의 마지막, 메어는 더 이상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고, 다른 상처 입은 친구를 위로하지만 캐서린은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한다. 드라마가 끝나도 캐서린은 여전히 조금의 희망이나 행복도 없이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알 것만 같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용서할 수 없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드라마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살하려는 범인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캐서린은 자살 중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자살 중재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범인에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범인은 대답한다.
"살아서 돌려보내려고 여기 왔다고 말해야죠. 이름을 자주 부르고요. 확신을 심어줘요. 상대를 안심시키면서 다정하게 공감해 줘요. 귀담아들어주고요. 앞날이 막막해 보여도 그런 생각은 지금뿐이라고 말해 줘요. 하루는 24시간이니까 언젠가는 다르게 보일 때가 온다고요."
나는 이 장면에서 이게 바로 캐서린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날이 막막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보일 때가 온다는 것. 그런 식으로 나를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범인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비록 그렇지 않겠지만요. 더 나빠질 뿐이에요."
어쩌면 범인의 이 말이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다르게 보이리라는 말은 그저 싸구려 위안, 거짓 말, 심지어 뻔하디뻔한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에서처럼 나를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그 말 또한 그저 요식 행위, 뻔히 수가 보이는 거짓말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그게 거짓말이라면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의 마지막 장면, 아들이 죽은 후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다락에 올라가는 메어의 행위,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려는 그 용기를 그저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걸 누가 감히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까? 거짓에 불과할지라도, 그걸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를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그런 마음을 믿는 것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그런 거짓이 진실이기를 바라는 그 마음 자체가 진실이라고.
만약 두 작품 중에 더 마음이 가는 게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해피 밸리>라고 대답할 것 같다. 둘 다 재밌지만, 특별히 <해피 밸리>를 꼽은 것은 이 드라마에 나오는 '앤' 때문이다. 앤은 시즌1에서 범인에게 납치되어서 엄청난 고통을 겪다가 캐서린에게 구출된 피해자였다. 그리고 시즌2에서 앤은 경찰이 된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앤은 캐서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뭔지 알아요? 내가 생각하는 신은 우리 모두가 지닌 선량한 마음이에요."
어쩌면 이 말 역시 한낱 거짓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앤은 살아 남았다. 그리고 살아가고 있다. <해피 밸리>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앤과 캐서린은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출동하는데, 캐서린은 경찰서에 돌아다니는 자신의 별명이 알고 싶어서 앤에게 계속 그게 뭐냐고 묻는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도착한 그들은 기계적으로 시체를 대하고, 다시 별명에 대한 대화로 돌아간다.
어쩌면 중요한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기계적으로 대하는 것. 시체를 앞에 두고도 자신의 별명을 궁금해하는 것, 그저 일상의 어떤 사소한 부분을 파고드는 것. 마치 앤이 아침마다 경찰복을 입고, 가끔씩은 실수를 저지르고, 상관의 별명을 짓궂게 부르고, 퇴근 후에는 가끔 술에 취하고 침을 뱉기도 하는 것처럼. <해피 밸리>의 마지막 장면, 캐서린은 가족들과 딸의 묘지에 들른다. 다른 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동안 캐서린은 뒤에 서서 절대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손자를 바라본다. 캐서린의 눈 속에는 여전히 슬픔과 좌절이 있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일상을 기계적으로 유지하면서. 그리고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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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