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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K의 반쯤 빈 서재] 나의 최초의 타인
<월간 채널예스> 2022년 9월호
엄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큼지막한 패턴으로 떠 그것으로 우리 두 사람을 감싸안을 수 있도록. 그 안에서 우리의 사랑과 고독은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2022.09.05)
서가를 훑어본다. 어떤 책은 모험이고 어떤 책은 스승이고 어떤 책은 충만함이다. 그러나 어떤 책은...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있을까? 반드시 마음 어딘가 다칠 걸 알지만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책. 내게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그렇다. DNA를 나눠 갖고 비밀 결사처럼 어느 한 시기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두 여자. 그 시기가 지나면 - 대개 딸 쪽에서 엄마를 -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이 반복되는, 더불어 서로를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한 관계.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에 지금의 내가 간신히 붙인 이름은 '불편한 사랑'이다.
시작은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였다. 『단순한 열정』이나 『집착』처럼 연인에 대한 질투와 갈망을 담은 그의 소설에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어머니에 대한 회고를 담은 책 『한 여자』는 마음 깊숙한 곳을 수차례 찔려가며 읽었다. 의례적으로 펴든 책에서 예상치 못한 상처를 받을 때 그 책은 메신저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바로 지금 이 책을 읽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모종의 강렬한 신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당시 내 나이 서른이었고, 결혼식을 올린 직후였다.
책은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했던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 치매 환자였다',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서 그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 같은 문장으로 이어졌다.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를 통해 어머니의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어머니의 개인사와 사회적 지위를 분석해 간다. 고등 교육을 받은 딸, 우아함과 교양의 세계의 일부가 된 딸을 보며 느꼈을 어머니의 자부심과 딸이 자신을 경멸하진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와 나의 엄마를 거울에 비춘 것처럼 어느 면 닮아 있었다. 엄마를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사랑이나 미안함이나 고마움 같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이었다. 엄마 인생의 가장 빛나는 트로피가 엄마보다 잘난 나라는 것, 동시에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져가 버린 존재 역시 나라는 것, 그 사실의 자명함이 불편했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책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나는 울었다. 엄마 나이 서른에 나는 다섯 살이었다. 뿌리가 뒤엉킨 식물처럼 서로의 삶이 완전히 뒤섞여 분간되지 않았으리라.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나. 내 나이 서른에 엄마는 쉰다섯, 아픈 데 없이 한창때인 엄마를 떠올리며 운 것은 이 책 덕분에 우리의 시차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는 엄마의 과거이며 나의 미래는 엄마의 현재라는 비가역성 때문이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을 내가 똑같이 경험하게 될 거라는 순수한 두려움도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이후로 작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쓴 책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내리사랑이나 희생 같은 '받는 사람' 입장의 단어로 납작해진 어머니가 아닌, 원망과 질투, 우울과 절망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들의 면면이 내 엄마를 더 잘 이해하게 도와주었다. 『멀고도 가까운』에서 리베카 솔닛은 "사람들이 '어머니'나 '아버지'라고 말할 때, 그건 서로 다른 세 가지 현상을 일컫는다."라고 말한다. "우선 당신을 만들고 어린 시절 늘 당신 위에 있는 거인이 있다. 그다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지하게 되는, 때때로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스스로 내면화한 부모님의 모습이 있다. (…) 이 세 모습이 한데 뒤섞여 혼란스럽고 서로 모순되는 삼위일체를 만들어낸다"고. 솔닛의 어머니도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솔닛은 어머니를 '뜯어지는 책' 같다고, '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같다고 썼다. 내가 세상에서 만난 첫 번째 타인, 그가 백지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솔닛은 이 책의 첫 문장에서부터 묻는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요컨대 저마다의 삶을 하나의 실처럼, 하나의 서사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실이 세상을 직조해 나가는 천이 되고, 그 천들이 이어져 패턴이 되고, 우리는 '강력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그렇게 이어져 패턴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는 것. '내면화한' 이야기에 맞서 새로운 패턴을 바라볼 수 있는 빈자리를 마련해 두는 연습을 해본다. 엄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큼지막한 패턴으로 떠 그것으로 우리 두 사람을 감싸안을 수 있도록. 그 안에서 우리의 사랑과 고독은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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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책 만드는 법』을 썼고 유튜브 채널 <편집자 K>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