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좋은 꿈을 만들어주는 이야기 (G. 김멜라 소설가)
책읽아웃 - 황정은의 야심한 책 (284회) 『제 꿈 꾸세요』
꿈조차 꿀 수 없는, 잠조차 들 수 없는 사람들한테 좋은 꿈을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잠들었을 때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게, 깨고 나서 웃을 수 있게, 그런 꿈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2022.08.25)
"찬 눈에서 녹슨 쇠 냄새가 났다. 목부터 정수리까지 쨍한 냉기가 퍼졌다. 그대로 내가 눈에 파묻혀 단숨에 지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죽어서도 쉬지 못했다. 이유를 찾느라, 인과 관계의 '인(因)'에 매달리느라 죽음의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빈 괄호로 두고 싶었다. 이제 죽은 나를 발견해주길 원하지 않았다. 내 죽음의 경위와 삶의 이력들을 오해 없이 완결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나와 이어진 사람의 꿈으로 가 그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세모의 꿈으로 가서 웃는 아이를 보고 싶었고 입술을 벌려 누운 아이를 보고 싶었다. 그다음 세모를 치과에 데리고 가서 조금도 아프지 않게 사랑니를 뽑게 해줘야지. 세모의 부은 뺨을 차가운 얼음으로 찜질해주고 얼어붙은 뺨을 내 뺨으로 녹여줘야지. 언젠가 오래 기다린 나에게 달려와 얼어붙은 내 뺨에 자기의 뺨을 대고 녹여주던 세모처럼. 규희와 동백떡볶이에서 만나 스위트콘을 넣고 떡볶이 국물에 밥을 볶아 먹어야지. 규희의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용 의자와 키즈 메뉴를 만들어볼까. 내 상상력의 힘으로. 내가 기억하는 기쁨을 위해. 벌써 그 꿈들이 도착해 나와 꿈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그 꿈들이 나보다 오래 머물며 사람들 마음을 떠다닐지도 몰랐다."
김멜라 작가님의 소설 『제 꿈 꾸세요』에서 읽었습니다. 방금 제가 낭독한 문단의 다음 문단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런 꿈을 나 혼자 만들 수 있을까."
오늘은 이 소설을 쓴 작가 김멜라 소설가를 만나보겠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것도 헛되지 않다"고 말하는 소설가를 오늘 모셨습니다. 두 번째 소설집 『제 꿈 꾸세요』를 출간한 김멜라 작가님입니다.
황정은 : 2020년에 『적어도 두 번』이라는 제목으로 첫 소설집을 내셨고, 2년 만에 단편 여덟 개를 모아서 이번에 두 번째 소설집을 내셨습니다. 한 계절에 한 편씩 부지런히 단편을 써오신 것 같아요. 2년 동안은 여덟 편을 모았으니까. 원고를 모으고 책을 내면서 어떠셨나요?
김멜라 : 제가 이제까지 살면서 그때처럼 열심히 살았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웃음) 엄청 열심히 쓰고, 눈 뜨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 쓰고 책 읽고 거의 쉴 틈 없이 계속 썼는데, 계속 바쁘게 지나가다 보니까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좀 여유롭게 돌아볼 시간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그걸 내가 이렇게 돌아보고 생각을 하는 순간, 몸이 돌처럼 굳어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두려운 기분이 좀 들기도 하고 해서, 글을 쓰는 동안 나한테 이 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아, 그때 내가 이런 순간을 보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열심히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황정은 : 첫 단편집을 냈을 때하고는 조금 다른가요? 어떠세요?
김멜라 : 첫 단편집은 사실 제가 책을 낼 수 있을지도 몰랐고 '어떤 분들이 읽을까, 어떤 나의 세상이 펼쳐질까'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했던 것 같아요. '책을 낼 수 있구나, 책을 내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다, 이 책이 내가 내는 마지막 소설집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냈기 때문에. 그때는 많이 혼자 생각하면서 썼던 소설이었는데, 이번 두 번째 소설집은 쓴 기간이 첫 번째랑 비교해서 그렇게 길진 않았고, 바로바로 쓰는 시간이 많았고, 리뷰 같은 것도 바로 이렇게 들을 수 있는 그런 과정이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첫 번째 때는 그냥 저 혼자 보이지 않는 메아리를 치는 기분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굉장히 가까이에서,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쓰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기분도 느꼈던 것 같아요.
황정은 :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다 보니까 사랑의 힘에 대해서 자주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그리고 이번 책 작가의 말에도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내용을 조금 읽어보자면 "사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것도 헛되지 않다. 이 책에 실은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뿐입니다"라고 쓰셨습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로도 읽히는데요. 작가님에게 사랑이 왜 중요한지도 궁금해요.
김멜라 : 첫 소설집을 내고서 제가 어떤 글을 쓸 때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를 생각한 것 같아요. 혼자서 좋아서 쓰는 거 말고도, 나라는 사람이 글을 써서 책을 내려면 많은 자원도 쓰고 많은 분들의 시간과 노력도 들이는데, 과연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게 어떤 공적의 유용함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첫 소설집까지는 그런 생각을 못했고, 두 번째 소설집 쓰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고. 그럼 내가 글로 쓸 수 있는 것, 글로 사람들한테 말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랑'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에는 사랑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아니야, 사랑 아니야,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는 걸로 나는 사랑을 쓸 거야' 이런 이상한 고집을 부렸다면, 지금은 '그래, 사랑이 있지.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고 나를 살게 하는 것 자체가 사랑인데 왜 이렇게 나는 그 사랑을 부정할까'하고 생각하면서 부정하지 않고 나한테 사랑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고, 이 세상이 그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저라는 사람이 없어도 남아 있고 싶은 것은 사랑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 글을 쓴 것 같아요.
황정은 : 저도 그랬습니다. 그게 참 희한한 거 같아요. 작업을 시작한 초반에는 세상의 사랑을 좀 인정하기가 싫은 그런 마음이 왜 생기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내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일까요. 저도 그런 과정을 거쳤던 것 같습니다.
김멜라 : 작가님이 『팔꿈치를 주세요』에 실으셨던 소설(「올빼미와 개구리」)에서도...
황정은 : 그렇습니다. 사랑을 믿는다고 이야기했다가 일종의 조롱을 당하는 인물이 등장을 하지요.(웃음) 제가 그 단편을 쓰고 나서, 그 인물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은 제 말이기도 한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후작업을 요즘 하고 있어요. 어떻게 사랑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올빼미와 개구리」를) 읽으셨군요.
김멜라 : 어떻게 내가 사랑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 그 순간에 대해서 짧게 문장이 나와서 저도 궁금했어요. 사랑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힘과 그런 순간이 뭘까.
황정은 : 그냥 사랑 자체인 것 같아요. 내가 믿든 안 믿든, 그냥 거기 있는데.(웃음)
김멜라 : 네, 맞아요.(웃음)
황정은 :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 중 일곱 편에 레즈비언이거나 레즈비언 관계를 암시하는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소설의 주요 화자들은 당사자라기보다는 그들을 관찰하는 입장일 때가 자주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시선의 위치가 조금 궁금했어요. 당사자 서술보다는 주변인의 관찰자적 서술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멜라 : 일단 레즈비언을 포함한 여자들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더 구체적으로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습작 시절에도 그랬고, 처음에 소설을 발표할 때도 여러 해 동안, 늘 남자 화자의 목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주요 인물들도 남자고. 왜 그랬을까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제가 그런 소설만 읽었던 거죠. 남자 화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바라보거나 남자 화자가 주된 서사를 끌고 가는 소설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좋아했고, 그래서 글을 쓸 때도 여성의 입장이나 여성의 사랑에 대해서는 쓰는 게 빨리빨리 나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제야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요. 레즈비언 포함해서 여자의 사랑 그리고 여자의 이야기를 쓸 때, 만약에 누군가 '왜 레즈비언의 얘기를 쓰냐'라고 질문을 해주신다면 저는 레즈비언이라는 관계에 대해서 특별하게 주목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인물과 인물이 나와서 갈등하거나 사랑에 빠지는 걸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로 따라가잖아요. 그것처럼 '레즈비언이네, 게이네' 이렇게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서사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고. 그래서 그런 인물의 얘기를 많이 쓰는데요. (화자가) 당사자의 입장이라기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인 이유는, 그렇게 하면 제가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읽을 때도 그렇고, 뭔가 처음에 시작할 때 불꽃같은 게 튀는 것 같아요.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낯설어하는 입장에서 그들의 사랑을 아주 내밀한 관계를 들여다봤을 때 튀기는 스파크 같은 것. 거기서부터 저도 시작하게 되고 그러면 그 끝까지 흘러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고요. 그 여자들의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봤을 때의 시선도 제가 글을 쓰면서 발견하게 되고. 그런 불꽃같은 스파크 같은 면을 저는 재밌게 여기는 것 같아요.
황정은 : 「논리」와 「제 꿈 꾸세요」는 죽은 화자가 등장하는 단편들입니다. 죽은 이를 소설의 화자로 세울 때 형식 면에서는 이야기가 좀 자유로워지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김멜라 작가님에게는 어땠나요?
김멜라 : 제가 정말 그리고 싶었던 것은 「논리」에서 어린 친구 '엘리'가 자기의 아픈 부분이나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자기를 긍정하는 것을 그리고 싶었는데, 엘리의 시선이 아니라 엘리의 그런 면을 좋아하지 않고 의심하고 그런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엄마가 보통 상황에서 이 딸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 엄마가 가장 이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상황을 좀 떠올렸고요.
『제 꿈 꾸세요』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악몽을 자주 꾸거든요. 잠꼬대도 되게 심해요. 막 소리치면서 깨는 것도 어릴 때부터 잦았고. 꿈꾸기가 무서워서 잠들기가 힘들었던 적도 꽤 있었어요. 제가 그렇게 악몽만 꾸니까 제 애인이 잘 자라는 밤 인사를 '잘 자요, 제 꿈 꾸세요'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어요.(웃음) 그런데 그 말이 참 좋더라고요. 누군가에게 좋은 꿈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거구나. 그래서 그거를 굉장히 좋게 간직하고 있다가, 정말 꿈조차 꿀 수 없는, 잠조차 들 수 없는 사람들한테 좋은 꿈을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살아서 (듣는) 이런 저런 말들이 아니라 잠들었을 때 그 사람들이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게, 깨고 나서 웃을 수 있게, 그런 꿈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황정은 : 그런 소망을 품은 화자의 이야기인 거죠.
김멜라 : 네.
황정은 : 저는 그 화자가 나의 죽음을 목격해줄 타인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꿈으로 타인을 즐겁게 해줄 목적으로 타인을 찾아다닌다는 설정으로 이 단편이 마무리되는 점이 정말 좋았습니다.
김멜라 : 네, 감사합니다.
*김멜라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 『공공연한 고양이』 등이 있다. 『소설 보다:봄2021』을 함께 썼다.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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