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작가 "폭력을 멈추는 것은 '용기'다"
『붉은 무늬 상자』 김선영 저자 인터뷰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학폭 미투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 소설 『붉은 무늬 상자』를 통해 단순히 '나쁜 이는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에서 벗어나 '용기'에 관해 말한다. (2022.08.22)
'학폭 미투'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지금, 많은 이들이 피해자들의 폭로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고 있다. 학교 폭력을 그저 해프닝으로 여기던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 폭력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옅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아픈 이들의 마음을 쓰다듬는 김선영 작가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학폭 미투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 소설 『붉은 무늬 상자』를 통해 단순히 '나쁜 이는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에서 벗어나 '용기'에 관해 말한다. 지옥과 같은 시간을 버티고 있거나 버텨온 누군가에게, 또는 타인을 위해 나서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가진 이들에게 위로와 같은 시간을 선사하는 김선영 작가. 그와 나눈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붉은 무늬 상자』를 집필하시며 가장 고민하셨던 부분이나 힘든 점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학교 폭력'에 대한 심각성을 아무리 얘기해도 줄어들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나와 있는 이야기와는 당연히 달라야 하고, 이 책을 읽고 현실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예인 과거 학폭 사건도 많이 불거지는 요즘인데요, 뻔한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쓰는 게 가장 고심한 부분이었습니다. 한 명의 피해자와 한 명의 가해자가 있을 때 다수의 목격자나 방관자도 한 공간에 있습니다. 폭력에 대한 여러 명의 감시자가 있고 그것을 저지하는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 우리 모두 '폭력의 감시자가 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지 않을까'하는 희망으로 시작했습니다.
흰 꽃이 가득한 '은사리 폐가'가 오랜 시간 상처를 안고 있던 공간이 '아·고·힐'이라는 힐링의 공간으로 바뀐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은사리 폐가'라는 공간을 떠올리게 되신 계기가 있나요?
몇 년 전부터 가까운 곳에 집필실 겸 힐링 하우스로 시골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주변을 돌아 다녔어요. 소설 속 은사리 집은 그때 만난 어느 시골의 폐가였어요. 풀숲을 헤치고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의 기이함을 잊을 수 없었어요. 자연의 무성함에 점령당한 집이었어요. 아무리 오래된 폐가라도 밀림처럼 마당까지 나무들로 빽빽한 집은 거의 못 봤거든요.
살림살이도 그대로 있고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사람들은 어느 한 날 순식간에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머릿속으로는 이미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내력을 상상하기 시작했죠.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야반도주하듯 집을 떠날 때는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걸까. 상상력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게 돼요. 그곳의 장소성이 이야기의 집을 짓는 순간을 제공해준 거죠.
이야기 속 '세나'와 '여울'은 거짓 소문에 휘말리는 비슷한 상황에 처했지만, 결국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눈길이 갔어요. 작가님께서는 서로 닮은 이 두 인물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궁금해요.
어떤 폭력에든 지지 않기를 응원했습니다. 폭력에 쓰러지거나 그로 인해 스스로를 해치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응원했습니다. 폭력은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행사하는 순간, 잘못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언어폭력은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낙인찍는 관습적 사고가 있는데요, 폭력의 동조자가 되지 않으려면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나를 통해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세나는 어떻게든 자신의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떠도는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친구 벼리가 있었으니까요. 더 큰 용기를 낸 것은 여울의 사연이 들어 있는 붉은 무늬 상자 속 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만은 여울이처럼 희생당하거나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죠. 세나에게 여울의 사연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냉정하게 사태를 들여다보고 용기를 내어 벼리, 태규, 동민과 연대하여 극복하고자 또 한 번의 용기를 내게 되죠.
처음에는 전학생이라는 불안한 입지 탓에 미묘한 따돌림을 보면서도 나서지 못했던 벼리가 세나와 함께하며 변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벼리와 세나처럼 '방관자'가 아닌 '방어자'가 되는 용기를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폭력의 중심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고 그 둘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결국 방어의 힘을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 사람들이 무관심하거나 방관하거나 외면하게 되면 피해자는 기댈 곳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방관이나 묵인은 곧 폭력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 가해자는 폭력의 강도를 더 키우게 되죠.
벼리가 세나에게 말을 걸고 왜 그런 폭력적인 말이 아이들 속에 떠도는지 세나의 입장을 들어보려고 한 순간, 세나는 '내 편이 하나쯤은 있구나'하며 힘이 생기죠. 그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을 풀어놓으며 스스로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도 불러일으키고요. 어떤 폭력에 대해서든 서로가 감시자가 되어주고 폭력에 대항하는 목소리에 함께 힘을 실어줄 때 용기가 생기고 방어의 힘도 내리라고 봅니다.
작중 심한 아토피를 앓고 있는 벼리는 주변의 시선이나 말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벼리와 같은 경우부터 다문화 가정, 장애 아동 등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편견을 받는 일이 아직도 너무나 많지요. 이러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어른들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건 눈에 익숙하지 않거나 잘 모를 때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다름 때문에 받는 고통과 어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도 많습니다. 가령 시각 장애인을 인도해줄 때 어떻게 하는지를 우린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함께 생활해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요. 함께 생활하며 서로 배려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다면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상호보완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다름에 대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지 '차이'를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입장과 어려움이 어떤 건지 헤아리게 되면 마음이 움직이고 함께할 수 있도록 마음이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드러나는 차별의 시선을 어른부터 거두어야 합니다. 차별의 계단은 어른들이 먼저 만들어놓죠. 그런 뒤 부지불식간에 아이들에게 차별의 눈을 가르치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차별이 담긴 것은 아닌지 면밀히 돌아보고 성찰하여 개선해가야 합니다. 무엇이 차별인지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이 잘못된 거라는 걸 인정할 때, 변화는 온다고 봅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붉은 무늬 상자'에 소중한 물건 세 가지를 넣을 수 있다면, 꼭 넣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 상자 속 편지에 적을, 미래의 '김선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싶은 것이 딱 떠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고 '지금 상황'에서 충분히 최선을 다한다고 믿기 때문에 딱히 미래의 저에게도 할 말은 없습니다. 지금의 제가 모여 미래를 또 만들고 있을 테니, 미래의 제 모습 또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김선영'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붉은 무늬 상자』를 읽은 청소년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인간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주변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죠, 그런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좋은 기운'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허락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게 인간의 숙명입니다만, 이왕이면 좋은 기운을 나눠주는 사람으로 좋게 쓰이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 혼자 살아남기도 바쁜데 그게 무슨 소리냐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나는 나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산다' 하는 순간, 내 시야가 얼마나 좁아지는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팍팍해 보이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나와 타인, 주변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구나' 하는 순간 나무도, 하늘도, 바람도 개미도, 강아지도, 친구도, 이름 모르는 낯선 사람도 모두 고마운 존재가 됩니다. 크고 작은 행복이 훨씬 많이 찾아오기도 하고요. 넓은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용기와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며 읽고 쓰겠습니다.
*김선영 1966년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까지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자연 속에서 사는 행운을 누렸다. 그 후 청주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학창 시절 소설 읽기를 가장 재미있는 문화 활동으로 여겼다. 막연히 소설 쓰기와 같은 재미난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십대와 이십대를 보냈다.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고 힘을 받는 소설을 쓰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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