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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다솔의 적당한 실례] 고양이라도 된 기분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그때마다 어둡고 깊고 홀로인 곳으로부터 따듯하고 투명한 손에 의해 사뿐하게 건져 올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꿉꿉한 마음이 여린 햇빛에 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2022.08.02)
“아니, 왜 그분이 즐겨찾기에 있어?” 친구가 내 휴대폰을 보자 묻는다. 즐겨찾기는 가장 자주 찾는 연락처를 단축 번호처럼 따로 모아놓는 기능이다. 나에겐 없어선 안 되는 인물들이 모여 있다. 엄마와 이모, 가장 친한 친구 둘 그리고 ‘부농 님’. 가족과 십 년 지기 친구라는 납득할 수 있는 인물들 뒤로 그 알 수 없는 이름 석 자가 있었다. 그러나 실로 부농 님은 영향력에 있어 그 위의 네 인물을 가뿐히 능가할 만큼 중요했다. 나는 손을 뒷머리로 가져갔다. “설명하자면 긴데….” 친구는 쉬이 의문을 접을 생각이 없는 듯 눈을 반짝였다. 나는 양옆으로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그 단어를 발음했다. “은인이야, 은-인.” 친구가 웃는다. “뭐야, 뭘 어쨌기에?” 나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말하자면 내 인생을 아홉 번은 구하셨달까. 이렇게 말하니까 고양이라도 된 기분이네.”
그들은 책을 잘 팔았다. 유난히 잘 팔았다. 난생처음 독립 출판을 했던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곳은 세련되지도 않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내 책을 받아준 몇 안 되는 책방이었다. 책을 부칠 배송비마저도 부담이었던 나는 책을 들고 직접 그곳으로 향했다. 인적이 많지도, 화려하지도, 넓지도 않던 서울 신촌의 손바닥만 한 책방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는 자신을 ‘상냥’이라 소개했다. '이후북스'는 상냥과 부농이 함께 운영하는 책방이었다. 상냥과 부농. 우선 그들이 각각 다른 두 사람이며 동시에 한 몸 같은 존재라는 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그들이 양말 한 켤레나 젓가락 한 벌, 쌍쌍바 하나처럼 너무 닮아서 포갤 수도 있는 한 쌍이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음과 양, 낮과 밤, 숟가락과 젓가락이 아닌, 전혀 다르지만 꼭 함께 있어야 하는 한 쌍에 가깝다.
작고 귀여운 참새처럼 짹짹 나에게 말을 걸던 상냥 님은 웃으며 책을 재밌게 읽었노라고 말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는데, 이후로 책은 무서울 정도로 팔려나갔다. 몇 년 사이 여러 번 재쇄를 거듭했다. 책을 재입고하러 갈 때마다 갓 입고된 다른 책들이 그의 키만큼 높게 쌓여 있고는 했다. 그 비법을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꼭 맞는 일을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의 종류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농 님께 전화가 왔다. “작가님, 인쇄 어떻게 하고 계세요?”
당시 나는 책을 팔며 남는 이윤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 책이 팔린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현상이었으며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감사하다고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원가와 배송비와 책방과 나누는 수수료 따위를 떼고 나면 국수 한 그릇 정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남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농 님은 깜짝 놀라며 “잠깐만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웬 견적서를 보내왔다.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큰 규모의 가장 저렴한 제작 견적이었다. 부농 님은 말했다. “이렇게 안 하면 안 남아요, 작가님. 팔아서 남기셔야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인쇄를 맡길 돈도 없고 보관할 장소도 없는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많이 찍어서 안 팔리면 어떡하죠?” 그러자 부농 님이 말했다. “돈은 투자 개념으로 저희가 선지불하겠습니다. 재고는 저희 창고에 두면 되고요. 저희가 다 팔겠습니다.”
나는 이 말도 안 되고 전지전능한 말이 현실이 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것은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듯 스르르 일어났다. 책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쌓였다가 세상으로 퍼져 나갔고 어느 순간 마법처럼 동이 났다. 나는 국수가 아니라 며칠을 배불리 먹을 식재료를 양손 가득 사 올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냥 님이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저희랑 계약하실래요? 저희는 작가님이 쓰시는 어떤 글이든 좋아요.” 그것이 나의 첫 출판 계약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도 “작가님, ‘열 문장 쓰기’라는 프로그램 진행해 보실래요? 작가님이라면 무조건 잘할 수 있어요.” 정식으로 책을 출간하고서도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막막해할 때도 “새로운 일 구할 때까지 저희 책방에서 아르바이트 하실래요?” 처음으로 글방 워크숍을 열 때도 말했다. “저희 책방을 거실처럼 쓰세요.”
그때마다 어둡고 깊고 홀로인 곳으로부터 따듯하고 투명한 손에 의해 사뿐하게 건져 올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꿉꿉한 마음이 여린 햇빛에 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난히도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터덜터덜 '이후북스'로 향했다. “오늘도 책방에는 손님은커녕 파리 한 마리 없네요.” 상냥과 부농은 한숨을 폭 내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야, 이거 네가 잘못 썼잖아, 멍청아!”, “야, 아니거든, 바보야! 어디 봐. 맞네, 잘못 썼네. 우씨!”, “푸하하하하! 바부탱이, 황부농!” 그 모습을 보면 돌처럼 무거웠던 마음 틈새로 언제 그랬냐는 듯 슬금슬금 웃음이 삐져나왔다. 상냥과 부농을 번갈아 보며 “사이좋게 지내세요. 그리고 저 밥 사 주세요.” 하고 어느새 까불거렸다.
나에게는 상냥과 부농이 있어 쓸 수 있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살아낸 날들이 있다. 그들에게 받은 아홉 가지 은혜를 다 적자면 이 지면이 작다. 그런데도 상냥과 부농은 나를 도와준 적이 없다고 믿는다. 구원이라는 말을 그들과 있을 때 뱉었다가는 그냥 다 같이 우하하 웃어버릴 것이다. 할 수 있어서 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뿐이라고. 그런 그들이 가끔 신 같아 보이곤 했다. 이야기를 수호하는 신. 좋은 이야기를 수호하고, 나누고, 이어지게 하고자 하는 그 숭고한 힘이 나에게까지 조금씩 비쳐드는 것이 아닐까 했다.
은인이란 한 번 정도 목숨을 구해 주고 일상에서는 잘 마주치지 않는 유(類)의 존재라고 믿었다. 신이란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나는 상냥과 부농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저 그들은 내 즐겨찾기 마지막 칸에 모셔져 있다. 우리는 여전히 존대를 한다. 그 둘이 나에게 너무나 단일한 나머지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도 자주 한다. 곧잘 실례를 범한다. “부농 님은 저보다도 악필이네요!” 나보다 키가 한참 작은 그를 내려다보며 짓궂은 표정으로 말한다. “거기 공기는 어때요?” 그들은 나를 그렇게 여러 번 구해 내고도 말한다. “푸하하하! 여기 공기, 아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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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소상공인.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