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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K의 반쯤 빈 서재] 책에 드러난다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그저 인생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이고, 그런 순간에 활용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도구로서의 언어, 그 언어가 사는 집으로서의 책, 그것에 깊숙이 관여하는 일을 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곤 했던 시간들을 한 번쯤 돌아보고 싶었다. (2022.08.01)
최근에 대면 강의와 강연이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편집자 일의 특별한 점에 대해 꼭 이야기했다. 편집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건, 이 일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자리에서건, 독서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건. 그건 그날 함께한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인 동시에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내 말은 나도 듣는다는 것을 자주 생각한다. 내 말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들으러 온 분들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라는 질문 없이 산다면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둘러봤을 때 생각보다 더 황폐한 곳에 다다라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일이 삶의 너무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에 살고 있고, 그냥 혹은 저절로 생기는 의미는 없으니까.
나의 ‘반쯤 빈 서재’에 문장으로도 적어두고 싶다. 편집자 일의 첫 번째 특별한 점이 바로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이기도 하므로. 대부분의 편집자가 그러하듯 나 역시 애독자였던 세월이 길다. 텍스트와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출판사에 입사했다. 실제로 편집자가 하는 일은 훨씬 더 까다로웠지만, 누군가 고심해 선택한 단어와 문장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살피고 다듬는 일인 건 분명했다.
그 텍스트에 물성이 더해져 책이라는 사물로 태어나는 건 지금도 참 신기하다. 제목을 정하고 표지를 입히는 과정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시작과 끝을 반복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종종 받는 질문 중에 편집자로 산 지 16년이 되었는데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있다. 나의 대답은 첫째로 이 일이 나의 생계 수단이란 것이고, 둘째로 책의 생애 주기를 관장하고 지켜보는 일이 지루할 틈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매번 다른 원고, 다른 작가와 일하므로 프로세스는 같을지라도 작업의 내용과 결과는 늘 다르다. 100% 만족스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한 권 한 권에 작은 성공과 작은 실패의 경험이 쌓인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기도 하고 조금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기도 하면서. 시장과 독자의 반응이 애초 예상과 그럴듯하게 들어맞거나 완전히 빗맞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또 다른 시작과 또 다른 끝이 이어진다. 이전에 만든 책이 이후에 만든 책에 영향을 끼치고, 자기가 만든 책들 사이의 연결 고리가 무엇인지 편집자는 안다. 이렇게 만든 책들이 나의 이력이 된다. 커리어에 스토리를 만들어준다. 세 군데 출판사에서 16년간 일했고 현재 문학동네 국내문학1팀장이라는 사실보다 내가 만든 책들의 목록이 내가 어떻게 일해 온 사람인지 더 잘 보여준다. 이로써 편집 일이라는 것은 ‘기술’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자주 느끼는 이 일의 특별한 점은 일을 하며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삶-사회-일’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많은 기획서가 편집자 개인이 그의 시대와 세대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편집자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그가 만드는 책에 드러난다. 나와 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 더 제대로 살고 더 잘 생각하고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도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세상에 없던 책을 태어나게 한다. 문학서 역시 그렇다. 작가가 쓴 작품에서 발견하는 가치와 그것이 향하는 상상의 독자가 편집자마다 다를 수 있다. 단순히 작품을 보는 안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차이가 생긴다.
뭐니 뭐니 해도 내가 만드는 게 다름 아닌 책이고 그것을 누군가 읽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매번 다른 물건을 고작 2000개 남짓 만들면서 유통처는 한정되어 있는, 놀라울 만큼 저마진에 저효율로 돌아가는 이 일련의 과정이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인생을 바꾸는 책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책이 인생을 바꿀 때, 그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들이 열리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 더는 되돌아오지 않는다.”(『그리움의 정원에서』), “독서의 길로 뛰어드는 그들은 언제까지나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 길이 끝이 없음을 알고 기뻐한다. 기쁨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중략) 그들은 황홀감에 취해 세상에서 물러나 이 고독을 향해 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고독의 골은 깊어진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살린다.”(『작은 파티 드레스』)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이 구절들에 나처럼 밑줄을 긋는 사람들이 있으리란 사실에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아아! 본격 추앙 타임인가, 지금은. 그저 인생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이고, 그런 순간에 활용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도구로서의 언어, 그 언어가 사는 집으로서의 책, 그것에 깊숙이 관여하는 일을 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곤 했던 시간들을 한 번쯤 돌아보고 싶었다. 이 일을 더 오래, 더 잘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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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책 만드는 법』을 썼고 유튜브 채널 <편집자 K>를 만들고 있다.
<크리스티앙 보뱅> 저/<이창실> 역8,750원(0% + 5%)
프랑스가 사랑하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를 출간한다. 자신이 태어난 도시 크뢰조에 머물며 오로지 글쓰기에만 헌신하고 있는 이 작가는 침묵 속에서 건져 올린 깊이 있는 사유와 어린아이와 같은 그의 순수한 미소를 닮은 맑고 투명한 문체로 프랑스 문단과 언론, 독자들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