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의 뒷면] 상실의 슬픔을 끌어안는 이야기의 힘 - 『엄마, 가라앉지 마』
<월간 채널예스> 2022년 8월호
간병인으로서 자식이 늙어가는 부모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항상 유머는 있고, 인간미가 있으며, 눈과 기억을 번득이게 하는 빛이 있습니다. (2022.08.01)
재작년 제주에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국인 이웃 톰 형을 알게 됐다. 그는 나보다 열 살쯤 위고, 오름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내가 서울에서 책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가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가져와 내밀었다. 영국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그의 오랜 친구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본 경험을 독립 출판으로 펴낸 책이라고 했다. 페이지를 넘기던 중 그림 하나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뇌 손상 과정을 썩은 사과에 빗댄 컷이었다. 썩은 사과? 순간 멈칫했다. 나의 사진 연작의 오브제가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톰 형에게 책을 빌렸다.
사실 나에게 썩은 사과는 상실과 애도의 짙은 은유이다. 지면상 다 전하지 못하지만 나는 사과 한 알의 부패(죽음)를 확인하고 노제(路祭)의 형식으로 2년 가까이 전국 곳곳을 사과와 여행하며 그 여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한 적도 있다. 어떤 슬픔은 오래 집중하면 온기가 된다. 내 안에 깊이 눌려 있던 상실감들이 하나둘 사과에 스며드는 사이, 나는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무언가와 헤어져 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슬픔을 응시하는 일은 해롭지 않은 경험이었다.
썩은 사과 그림 하나로 끌렸던 『엄마, 가라앉지 마』는 기대 이상이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2년 동안 돌보며 경험한 슬픔과 고통,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스스로 가라앉지 않으려는 노력의 감동적인 회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고통스러운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에서조차 유머와 담담함을 잃지 않는 스토리텔링이었다. 문장은 매우 간결하고 명확해서 시적인 산문을 읽는 느낌이 들었고, 완결성 또한 흠잡을 데 없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싱긋 출판사에 출간 제안을 했다. 마침 이러한 주제를 찾고 있던 출판사도 긍정적이어서 계약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사실 해외 출판 계약의 경우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은 저자와의 직접 계약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접촉 과정 자체가 복잡할뿐더러 시간도 오래 걸리는 등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저자 나이젤 베인스와는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프리랜서 북 디자이너라서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때문인지 메일을 보내면 전송 완료 몇 초 만에 바로 확인하고 성의 있게 답신을 주곤 했다. 영국과 한국이 이렇게 가까웠던가.
번역자를 선정할 때 싱긋 대표님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시인이기도 한 황유원 번역가를 추천했다. 최근에 그가 번역한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터여서 그라면 이 책의 결을 잘 살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나는 16년 차 편집자로 지금까지 정말 많은 책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우리말로 옮긴 이 원고를 처음 열었을 때의 뭉클한 느낌을 잊지 못한다. 저자가 유명하지 않아도, 독립 출판으로 출간된 작은 책이어도 원고의 우수성과 진정성, 가치만 충분하다면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들고 싶었다.
『엄마, 가라앉지 마』를 편집하던 중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 개봉 소식을 들었다. 고령화 시대의 익숙한 키워드인 치매와 노인 돌봄을 소재로 가족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라기에 일단 관심이 갔는데, 책의 독자와 영화의 관객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실제로 이루어졌다. 지난 6월 말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번역가, 영화감독, 기획 편집자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씨네북토크’라는 독특한 이벤트가 열린 것이다. 이날 나는 나이젤 베인스에게 특별히 요청해 받은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간병인으로서 자식이 늙어가는 부모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항상 유머는 있고, 인간미가 있으며, 눈과 기억을 번득이게 하는 빛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오랜만에 썩은 사과 사진을 꺼내 보았다. 이야기는 역시 슬픔을 상대하기에 제법 괜찮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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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문학 편집자로 오래 일했다. 사진 에세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을 썼고, 현재 제주도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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