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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작법서, 작가의 토템 (1)
<김초엽의 창작과 독서> 10화
그 카페에서 나는 일요일 내내 소설을 썼다. 오전부터 밤까지, 일요일을 꼬박 글 쓰며 보내고 나면 월요병이 더 심해졌다. (2022.07.13)
2016년, 대학원 연구실에 다니던 시절, 일요일 오전마다 나는 극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베개 밑에서 알람이 마구 울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알람을 다섯 번은 더 미루고 싶었지만, 옆 침대에 깊게 잠들어 있는 룸메이트의 눈치가 보였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씻는 둥 마는 둥,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오면 아직 공기가 서늘했다. 캠퍼스는 눈뜬 사람이 없어 고요했는데, 나는 화학관 대신 다른 방향으로 걸어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걷다 보면 조용한 시장 문턱, 나무 계단 위 2층에 일찍 문을 연 카페가 보였다. 내가 일요일마다 ‘출근’하는 장소였다.
그 카페에서 나는 일요일 내내 소설을 썼다. 오전부터 밤까지, 일요일을 꼬박 글 쓰며 보내고 나면 월요병이 더 심해졌다. 때로는 토요일에도 카페에 나와 글을 썼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설 쓰기는 그때도 내게 그다지 즐거운 취미는 아니었다. 에너지를 채우기보다 잔뜩 끌어다 쓰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일정을 고수했다. 안 그래도 바쁘고 정신없는 대학원 시절에, 어떻게 그런 고행을 해냈는지는 돌이켜봐도 잘 모르겠다. 연구는 해도 해도 결과가 안 나오는데, 소설은 시간을 들이면 완성이라도 된다는 점이 좀 위안이 됐던 걸까? 어쨌든 나는 꽤나 진지하게 소설 쓰기를 대했다. 마치 소설 쓰기가 나의 또 다른 직업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냥 취미인데도, 취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그때 쓰던 글들은 대개 지인들과의 소설 창작 모임에 낼 글이거나, 공모전이나 투고를 염두에 둔 단편 소설이었다. 예전부터 온라인 게임 길드니, 보드게임 모임이니 하는 취미로 알던 지인들이었는데, 우리는 사는 지역도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대부분 10대, 20대 시절에 PC 통신과 웹 연재 판타지 소설의 전성기를 거쳐왔고, 그 밖의 온갖 서브컬처의 수혜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A4 반 페이지라도 좋으니 무엇이라도 짧은 소설을 써와서 함께 읽고 피드백을 나누자는 이 단순한 목적을 지닌 모임에 나는 페퍼톤스의 노래 제목 에서 따온 이름을 제안하고 붙였다. 우리 중 프로 작가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글을 기다린다는 낯선 감각 때문인지 다들 열심히 매주 글을 써왔다. 나는 이 모임에 제출할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 글을 낼 수 있는 공모전이나 투고 지면을 알아봤다. 매주 모임을 하며 글 쓰는 연습을 꾸준히 하고, 긴 작품도 준비해서 투고를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제 막 습작을 시작한 셈이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마감이 있는 쪽이 의욕이 생기니까.
당시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일종의 작은 ‘의례’를 진행했다. 노트북을 펼치고, 공책과 펜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소설쓰기의 모든 것』 같은 작법서를 노트북 옆에 올려두는 것이다. 소설을 쓰러 나왔으니, 뭐라도 꼭 쓰고 가겠다는 다짐 같은 거였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그 책 표지를 보면 무척 부끄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묘한 의식이 더 글을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기숙사에도, 연구실 책장에도 작법서를 항상 꽂아두었다. 가방에는 늘 노트북, 그리고 작법서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단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않는 날도 많았는데, 그게 무슨 필수적인 작업 장비나 토템, 행운을 불러오는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고 다녔다. 그건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환기하는 물건이었다. 소설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지 몰랐고, 그저 취미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으며, 부업 같지만 실제로는 소설로 푼돈조차 벌어들이지 못하던 그 시기에, 나에게는 작법서처럼 손에 닿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고 묵직한 질감도 느껴지는, 형태를 지닌 ‘결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작법서를 좋아한다. 심지어 내가 소설을 절대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10대 때도 그랬다. 당시 널리 읽히던 『유혹하는 글쓰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 같은 책을 사서 열심히 읽고는 했다. 소설 쓰기에 도전해봤다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글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소설 역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내가 그런 작법서나 소설가의 에세이를 한참 읽고 내린 결론은, ‘역시 소설가가 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였다.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가란 나와 다른 종족처럼 느껴졌다. 10대 시절 읽은 작법서들은 나에게 소설을 쓸 용기를 주기보다 소설가에 대한 환상만 키운 셈이다.
특히, 나는 유명한 작가들의 조언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이를테면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플롯에 대한 불신을 여러 번 드러내며 “플롯은 좋은 작가들의 마지막 수단이고 얼간이들의 첫 번째 선택”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소설이란 땅속의 화석처럼 발굴하는 것이기에 플롯을 믿지 않는다면서. 그러면서 플롯 같은 건 던져놓고 일단 흥미진진한 상황, ‘만약’으로 시작하는 질문을 만든 다음, 그다음 장면을 써보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나는 프롤로그만 수십 번 써본 전적이 있었고, 이제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런 건 내 머릿속에 없었다. 없어서 못 쓴 것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같은 책들은 작법보다는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를 이야기하는 책인데, “첫 생각을 놓치지 마라”, “말하지 말고 보여 줘라”는 식의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중요한 조언도 그때의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단 써라, 뭐가 됐든 써라”는 말도 소설 쓰기에서라면 실천할 수 없었고(다음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는 것에서 출발하라”는 말도 나에게는 해당이 없었다.(아는 게 전혀 없었다...)
한편,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은 내가 10대 때 읽었던 글쓰기에 관한 책 중 작법을 가장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었다. 이 책은 플롯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도입부와 ‘위대한 플롯’ 스무 가지를 소개하는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널리 알려진 영화와 소설의 예시를 들어 각각의 플롯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돈키호테』와 『오즈의 마법사』는 ‘추구’의 플롯이다. 주인공은 인생 전부를 걸어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장소를 돌아다니고 온갖 장애물을 맞닥뜨리며, 그 결과 주인공은 크게 변화한다. 한편,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는 ‘추적’ 플롯을 이용한다. 〈죠스〉, 〈터미네이터〉, 〈에일리언〉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이 플롯에서 작가들은 반전과 같은 트릭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하고,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며, 좁고 제한적인 장소를 활용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스무 가지 플롯으로 분류하고 창작의 조언을 주는 이 책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어쩐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밑줄을 잔뜩 긋고 귀퉁이를 접어두었다가, 한번은 실수로 물을 쏟아 속상해하다가 새로 책을 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작법서로서의 구실을 전혀 못 했다. 책을 읽은 나는 오히려 막막해졌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책을 덮고 내가 아는 이야기를 스무 가지 플롯으로 분류해보거나, 내 소설에 적용해보거나 한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시도는 해봤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예전에 수학을 공부하면서 온라인 강의를 들었는데, 영상 속 강사가 엄청난 기술을 발휘해 어려운 문제를 풀고는 “어때요, 쉽죠?” 하는 걸 보면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강의를 끄고 문제집을 펼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는 했다. 이 스무 가지 플롯 분류법도 내게 비슷한 기분을 들게 했다. 지금도 나는 내 소설을 어느 플롯 카테고리로 넣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무척 유용했을 이 플롯 분류법은, 나에게는 영상을 끄면 증발하는 수학 강사의 화려한 문제 풀기 스킬 같은 것이었다.
당시는 인터넷에 연재되던 로맨스나 판타지 등 장르 소설 분야에서 10대 작가가 꽤 많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작법서들의 조언으로부터 약간 뒷걸음친 다음에는 재능을 단념하기 쉬웠다. 글의 완성도나 매끄러움을 떠나서 그저 재미있게, 다음 내용이 궁금하게 쭉쭉 써나가는 또래 작가가 잔뜩 있던 시기였다. 그런 걸 보면 역시 나에게는 이야기를 쓰는 재능은 없나봐,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렇게 여러 ‘신비로운’ 책을 읽으며 소설가에 대한 환상만 무럭무럭 키웠던 나는 정작 소설을 쓰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다. 대학 시절 내내 글쓰기를 거의 부업 삼으면서도 소설만큼은 결코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2015년쯤 갑자기 소설 습작을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이 시기 돌연 습작을 시작한 것도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작법서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주위에 하면 많은 이가 “도대체 그 작법서가 뭐예요?” 하고 궁금해한다. 하긴, 마치 성서나 계시 같은 작법서를 만났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니까.
없던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슨 성서를 만난 것도 아니다. 그 작법서의 조언이 왠지 마음에 깊게 와 닿았고, 그래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참고로 그 책은 『소설쓰기의 모든 것 1: 플롯과 구조』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내가 어린 시절과 달리 소설 쓰기에 대한 환상을 덜어낸 이후였던 것이 크지 않았나 싶다. 10대 시절에 나는 소설을 쓸 거라면 『해리포터』나 『룬의 아이들』 같은 소설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리즈로 이어질 만큼 길고,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눈을 뗄 수 없는 극적인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를. 당연히 그런 소설을 쓸 재주는 나에게 없었으므로 소설을 쓸 용기도 없었을 수밖에. 하지만, 자라면서 나도 소설의 영토가 매우 넓다는 것을 알았고, 나를 환영해줄 마을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학교 여름 특강으로 단편을 완성해본 것도 중요한 계기였다. 그전에는 한 번도 소설 한 편을 끝까지 써본 적이 없었다. 다다음 해 교내 SF 공모전에 도전하면서 두 번째 단편을 완성했다.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두 편을 완성하자 나도 소설을 ‘쓸 수는’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마침 만난 작법서들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것이다.
“소설도 배워서 쓸 수 있답니다!”
그때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타고난 작가들 말고, 어릴 때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밤낮으로 들려주며 친구들을 휘어잡았던 그런 작가들 말고, 스토리텔링의 재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나도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몇 권의 작법서를 읽으며, 나는 진짜 소설 쓰기의 세계로 진입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첫 장면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때, 장면과 장면 사이를 전환하는 방법이 궁금할 때, 회상 장면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마다 작법서를 참고했다. 하나하나 조립하듯, 바닥부터 쌓아 올리듯 소설 쓰기를 익혔다.
이런 경험들 덕분에 그간 나는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작법서라고 서슴없이 말해왔고, 글쓰기 조언을 구하는 분들에게도 작법서를 추천해왔다. 그런데 얼마 전 책장 정리를 하면서, 작법서들을 책장 한군데 모으고 다시 펼쳐보면서 한 가지 기묘한 사실을 발견했다. 곰곰이 살펴보니, 나는 딱히 작법서대로 소설을 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조언대로 써보려고 전전긍긍한 흔적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줄 그어둔 조언과 메모는 이제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럼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작법서들을 읽고, 줄을 긋고, 조언을 노트에 옮겨 적고 했던 것들은 다 뭘까?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 걸까?
지금 와서 해본 생각이지만, 작법서에는 그것의 진짜 기능(창작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약간의 주술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주술과 부적, 미신적인 믿음이 깃든 모든 물건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해주는 눈에 보이는 물건들은 중요하다. 신비와 신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뇌를 달래는 플라시보 효과는 엄연히 실재하는 법.
나는 그 작법서들이 지난 글쓰기의 과정에서 소망이 깃든 토템처럼 작동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을, 언젠가 소설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물론이고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하던 시절에도, 책상 위에 올려진 작법서는 내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일깨워주고는 했다. 그리고 일단 펼치기만 하면, 아이디어의 사막에서도 어딘가 뿌리내린 선인장 하나는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고는 했다.
작법서가 토템처럼 작동한다고 해서 작법서의 진짜 기능을 부정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내 생각에 작법서의 가장 큰 위력은, 소설 쓰기를 이제 막 시작했지만, 아직 손에 맞는 방법을 찾지는 못한 시기에 발휘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작법서가 창작에는 정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최대한 다양한 창작법을 시도해보도록 제안하는데, 나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많이 배웠다.
새로운 작법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새로운 조언대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장면을 고쳐 썼다. 작법서를 한창 열심히 읽던 시기에는 매 작품을 쓸 때마다 ‘지난번과는 다른 방식으로’ 썼다. 그렇게 계속 하다보니 나에게 잘 맞는 도구가 무엇인지 알게 됐고, 그 도구들은 나의 무의식으로 편입되었다. 내가 잘 다루지 못하는 도구들은 ‘도전 과제’의 목록으로 들어갔다. 결국, 배운 것은 소화되어 내 언어로 다시 정렬되어야 한다. 오랜만에 펼친 작법서에서 “어, 지금은 이렇게 안 쓰는데”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 건 그만큼 그 조언들을 여러 번 곱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데뷔 이후,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작법서를 열심히 사 모았다. 마침 국내 출판 시장에 작법서 전성기라도 찾아온 것인지 서점에 온갖 작법서가 쏟아지고 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작법서 애독자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머리는 텅 비어 있을 때, 소설을 쓰다 툭툭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을 때 작법서를 펼친다. 물론 책장에는 그저 그곳에 꽂혀 있는, 단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지만, 오직 존재만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작법서들도 있다. 그 책들을 보면 뿌듯하다. 언제 저 책을 펼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 아닐까?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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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1993년생.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원통 안의 소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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