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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K의 반쯤 빈 서재] 책과 커피
<월간 채널예스> 2022년 7월호
책과 커피는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책과 술을 즐기는 곳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책에는 커피가 기본값이라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2022.07.05)
얼마 전 출판사 편집자와 디자이너 지인들을 만나 서울 연희동에서 밥을 먹고 카페 라우터에 들렀다. 때마침 출판사 마티와 협업해 책을 전시하고 새로운 블렌드 원두를 만들어 소개하고 있었다. 카페 통유리 창밖으로 우거진 나뭇가지와 나부끼는 이파리들, 그 풍경과 잘 어울리는 ‘숲’과 ‘바람’이라는 원두로 내린 커피. 마티의 책 표지들을 엄지보다 살짝 큰 정도로 출력해 허쉬 초콜릿을 감싼 ‘책 초콜릿’은 또 어떻고. 실물보다 확실히 작아진 것을 들여다볼 때 사람들의 표정은 사랑스러워진다. ‘마티랑 라우터랑’에서 따온 ‘랑랑’이라는 순회전 이름도 영롱하다.
사람들은 커피를 기다리며 가까이 비치된 마티의 책들을 꺼내 보았다. 슥슥 훑어보다가 자리로 가져와 이어 읽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출판인 마음은 또 두근거리고…. 그렇다. 온라인 서점에서 보는 책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보는 책이 다르고, 서점에서 만나는 책과 서점 아닌 곳에서 만나는 책이 또 다르다. 누군가의 첫 번째 책 혹은 운명의 책이 꼭 서점에 있으리란 법 없다! ‘초여름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이 전시의 카피는 출판사와 카페, 카페와 카페 손님, 손님과 책 그리고 새로운 독자로 이어질 것이다. 우연이 없다면 운명도 없겠지. 가로세로 20cm 안팎의 작은 문을 열고 부디 많은 분들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기를.
나의 우연한 만남은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 파리 좌안 1940-50』이었다.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담겨 있던 책을 실물로 보니 들춰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시의 불쾌한 현실이 담긴 디테일도 영감의 원천이 되는 곳. 이곳은 타자와 만나기 위해 고안된 도시임이 분명하다. 파리에서는 우연한 만남이 도시를 설계하는 데 힘을 발휘했다.” 같은 문장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카뮈와 베케트, 자코메티, 뒤라스 등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된 인물들의 개인적이고 또 사회적인 삶의 디테일이 촘촘히 새겨 있어 홀린 듯 붙잡고 읽었다(아버지 역할에 힘들어하는 카뮈가 아이 없는 삶을 택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부러워한 이야기와 그가 미국 유명 문학 출판사 ‘크노프’의 그 크노프와 만난 이야기가 한 페이지 앞뒤로 이어지는 책이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어…). 이렇게 만나려고 장바구니에서 먼지 쓰고 있었나 싶었던 책, 소장한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책을 카페에서 읽었다. 책과 커피는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책과 술을 즐기는 곳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책에는 커피가 기본값이라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북 카페가 익숙한 것도 마찬가지고. 책과 커피에는 각성 효과가 있다. 내면의 각성과 신체의 각성. 정신적 각성과 물리적 각성.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둘을 함께 하면 느긋해지기도 한다. 커피 한 잔, 책 한 권이 주는 여유로움. 요컨대 책과 커피는 우리 몸과 마음을 팽팽하게 조였다가 느슨하게 풀어주는 최고의 동료이자 공모자인 셈.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추고 눈을 들 때, 우리는 세상을 보는 동시에 자신을 본다. 커피 한 모금은 그 순간을 지속시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에서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이 나를 축복했다.”라고 쓰기도 했다.
라우터 한쪽 벽에 전시된 작품도 언급하고 싶다. 작품명 ‘책과 커피’(마티 편집자 1, 2 그리고 디자이너 / 『계속 쓰기』 2쇄 가제본, 라우터 커피, 2022). 가제본은 인쇄된 책을 제본하기 전 단계로 책등과 책배가 모두 뚫려 있다. 온전한 무언가가 되거나 이상한 파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채 미결정인 상태로 자유로운 것. 그중 일부 페이지가 두서없이 전시돼 있다. 멀쩡한 페이지가 없다.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우리에게는 냉정함이 아니라 명철함이 필요하다.”), 플래그가 붙은 페이지(“종이는 당신의 거울이다.”), 중요 표시가 된 페이지(‘작업을 시작하자’라는 꼭지명에 동그라미 여러 개와 별표) 그리고 열 몇 쪽의 페이지 모두에는 서로 다른 모양의 커피 자국. 방울방울 떨어진 모양부터 원통형을 지나 연기가 피어오른 것 같은 모양까지. 무정형의 연합으로 책과 커피가 한 몸이 되어 있다. 책을 전혀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는 누군가를 상상하게 한다. 지금껏 책에 단 한 번도 커피 자국을 내본 적 없는 나에게 작은 해방감이 찾아든다. 이토록 잘 어울리는 책과 커피, 좀 더 적극적으로 누려볼 여지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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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책 만드는 법』을 썼고 유튜브 채널 <편집자 K>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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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푸아리에> 저/<노시내> 역17,500원(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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