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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다정한 달력 - 『농부 달력』
그림책 『농부 달력』
그림책 『농부 달력』은 바로 이 사려 깊은 문장으로 시작해요. 앞표지는 그림 달력인데요. 마늘과 양파가 ‘농부 달력’이라는 제목을 지키고 있고 그 아래 42장의 작은 그림이 있습니다. (2022.07.01)
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되는 문장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요즘은 별로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예전 문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곤 했어요. “댁내 두루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으면 마음이 그렇게도 좋았습니다. 두루 평안하다는 이야기처럼 사람을 안심시키는 말이 또 있을까요. 전혀 엉뚱한 연상이지만 두루미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얀 두루미가 날개를 펴고 가까운 하늘에서 고요하게 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조금 다른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그림책 『농부 달력』은 바로 이 사려 깊은 문장으로 시작해요. 앞표지는 그림 달력인데요. 마늘과 양파가 ‘농부 달력’이라는 제목을 지키고 있고 그 아래 42장의 작은 그림이 있습니다. 그 안에 사계절의 변화와 24절기의 흐름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조혜란 작가의 『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도 비슷한 계절 달력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 책은 더 촘촘하고요. 일거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상하게 챙겨서 보여주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절기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의 황경에 따라서 1년을 24등분하여 나눈 것입니다. 절기와 절기 사이는 대략 15일 정도 되는데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 네 개의 기둥을 이루고요.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이 그 사계절의 기둥 사이에 놓여 있어요.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난다는 경칩이나 밤이 가장 긴 동지는 잘 아실 거예요. 엄동설한에 푸른 채소가 나오고 삼복더위라도 에어컨을 켜면 서늘해지는 것이 익숙해서 언제부터인가 도시는 계절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시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자연의 달력은 지금도 차곡차곡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림책을 펼치면 노부부가 눈을 치운 뒤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둥근 밥상에 앉아서 “밥 먹고 읍내에 다녀옵시다”라고 말합니다. 장이 서는 날이거든요. 슬슬 날이 풀리니 미용실의 파마 손님도 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창고가 추웠는가. 감자 종자 몇 개가 바람 들어서 얼어 부렀네”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밭에 심을 실한 씨앗을 챙깁니다. 할머니는 “새들이 조금 파먹고 굼벵이, 지렁이가 또 조금 먹고 남는 건 우리 것이지”라며 돌 골라낸 땅에 느긋하게 씨앗을 뿌리고요. 할아버지는 고루고루 흙 이불을 덮어주면서 새싹 되는 꿈을 꾸라고 덕담을 합니다.
이 책 안에서는 아무도 서두르지 않아요. 때가 되면 꽃이 피고 꽃이 집니다. 뜨거운 여름 햇볕은 누구 눈치 보는 일 없이 쨍하게 내리쬐고 열매는 그 아래에서 얼마나 묵직하게 익어 가는지 몰라요. 독자는 때때 맞춰 할 일에 분주한 농부 할머니와 할아버지 곁을 조르르 따라다니며 두런두런 농사 얘기를 듣습니다. 쑥대가 올라오면 뻣뻣해서 먹지 못한다는 것도 배우고요. 노린재가 깨 윗머리를 뜯어먹으면 열매가 열리지 않아 참깨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먹는 장면입니다. 잠자리 낮게 들어 비 오는 날은 하루치 일을 쉬어 가며 처마 밑에 앉아 두 분이 전을 부칩니다. 고구마 순 무쳐서 저녁 해먹자는 대화를 읽다가 절로 군침을 꿀꺽 삼키고 맙니다. 이 댁에는 누렁이 동구와 바둑이 동구 색시가 함께 살고 있는데요. 개들도 든든히 먹고 살아야지요. 개미 파먹은 데 도려내고서 달콤한 참외도 깨물어 먹고요. 젖먹이 강아지들을 끼고 있는 동구 색시는 푹 삶은 고기 국물에 한 상 든든하게 받아먹습니다. 탱자는 청으로 담가 속이 답답할 때 먹으면 좋다는 것도 알게 되네요.
김선진 작가는 그림책 『나의 작은 집』에서 지난 시절에 카센터였고 한동안 동네 사진관이었다가 이제는 화가의 작업실이 된 작은 집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습니다. 다 읽고 나면 저절로 동네 사람들이며 풍경에 흠뻑 정들어 버리게 만드는 작품이었어요. 오래전 종이인형 놀이를 기억하세요? 김선진 작가의 그림 속에는 그 인형놀이처럼 구석구석 잘 따서 간직하고 싶은 사랑스러운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참깨처럼 작은 개체들을 놓치지 말고 하나하나 들여다보세요.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경운기 뒤에 할머니가 걸터앉아 있는 부분입니다. 두 손으로 경운기 짐칸을 꽉 붙잡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고단하지만 보람찬 하루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아요. 깨 털던 할머니가 가을 무화과 따느라 발뒤꿈치 들고 있는 장면도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수고했네.”, “수고했소.” 하며 서로 똑같이 ‘하소체’와 ‘하게체’를 쓰는 것도 보기 좋습니다. 더 고생하고 덜 고생한 것이 없는 것처럼 더 누리고 덜 누릴 것도 없는 풍족한 한 해가 함박눈과 함께 끝납니다.
도시인의 달력은 휴대폰 안에 있고 쉬지 않고 알람이 울려댑니다. 겁 없이 몰아치는 일은 왜 그렇게 많은지 오르락내리락 하루 한 달 일 년이 난리도 아니죠. 이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그런 번잡한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농사일이라고 해서 결코 바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요. 해야 할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농부의 마음이 읽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억지로 뭘 어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줍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 달력을 보았고 다이어리를 잘 쓰는 법에 대해서는 인터넷 강의까지 찾아본 적이 있지만 저는 당분간 이 달력에 마음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과속의 나날을 내려놓고 그림책 속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정속 주행의 비결을 배워야겠어요.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본래의 감각을 지녀야만 비로소 건강과 행복이 깃들 수 있는 것 같아요. 댁내 두루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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