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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특집] 나무 공부, 생명 공부 -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

<월간 채널예스> 202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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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사람살이를 지켜온 큰 나무 그늘에 들어 꽃과 열매, 줄기와 가지를 톺아보는 시간. 시집으로 시작한 ‘나뭇잎 수업’은 끝날 수 없는 생명 공부다. (20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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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앞두고 실체 없는 설렘으로 야단법석이던 1999년 세밑, 나이 마흔의 첫해를 넘긴 나는 오래된 시집들을 꺼내 들었다. 바닷가 숲속의 작은 집에 틀어박혀 무위도식으로 두 달을 보낸 바로 뒤였다. 숲속 작은 집에 머무르는 동안에 무료와 적막을 이겨내는 방법은 숲길 산책뿐이었다. 그 길에서 오리무중인 내 앞을 닦아 세운 건 나무였다. 나무들은 바닷바람에 실려 온 해조음을 담고 숨 막힐 듯 곧추서 있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나무의 노래는 신화 속 세이렌의 노래처럼 잠 못 이루는 깊은 밤까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숲을 뒤로하고 다시 도시에 돌아와서는 제일 먼저 먼지 쌓인 시집들을 꺼냈다. 나무가 부르던 노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숲에서 마주쳤던 온갖 나무들이 숱하게 많은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하나둘 형체를 갖추고 살아났다. 때로는 한 그루의 나무, 한 장의 나뭇잎이 한 편의 시를 이루는 바탕이기도 했다. 만년필에 새 잉크를 채우고 새로 장만한 맑은 공책에 베껴 썼다. “뿌리 하나는 이 지구의 핵에 닿아”(조용미, 「백송」 중에서) 있고, 밤이면 주위를 도는 별들의 좌표가 된다는 시인의 나무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은 갈급했다.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손택수, 「어부림」 중에서) 바닷가에 물고기가 꽃놀이 오는 숲도 마찬가지였다. 길 위에 올라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나무와 생명의 영혼을 담은 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까닭에 나무를 찾아 떠도는 나의 길도 쉼 없이 이어졌다. 험하고 고된 길이어도 나무 앞에 이르러 큰 숨 들이쉴 때면 시인처럼 가슴이 벅차 올랐다. 직장 생활 십여 년 동안 내 인생에서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찬란한 빛이 가난한 여행길에 천둥처럼 쏟아졌다. 시인의 흉내를 내며 가만히 눈 감고 나무의 숨결에 귀 기울였다. 재우쳐 더 많은 길에 올랐고, 그 길에서 많은 나무를 만났다. 나무 곁에서는 어김없이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살이의 아름다운 자취였다.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사람살이의 무늬, 곧 인문(人文)의 역사였다. 사람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사람의 향기를 지켜온 나무를 한 편의 시로 느끼려던 시작은 쓸모가 있었다. 내 앞의 시편들은 모두 나무처럼 한결같이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담고 있었다. 나무는 시가 되고, 시는 나무가 됐다.

가뭇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나뭇결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모아서 글과 사진으로 적었다.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일기 쓰듯 쓰고 또 썼다. 수북이 쌓인 시집 곁에 묵직한 식물도감을 보탠 건 그때였다. 나무의 속내를 더 샅샅이 알아야 해서다. 마흔 넘겨 시작한 식물학 공부다. 체계도 순서도 없이 덤벼든 터무니없는 수작이었다. 그래서 절박했고, 더 많은 책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에서부터 대학교 식물학 전공서까지 닥치는 대로 찾아 밑줄을 치고, 베껴 썼다. 공부가 보태질수록 나무 앞에 서는 일은 행복해졌다. 이 땅의 사람살이를 지켜온 큰 나무 그늘에 들어 꽃과 열매, 줄기와 가지를 톺아보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고 행복의 크기도 커져만 갔다. 천지간의 모든 시름 내려놓고 나무 그늘에 누워 보내는 시간은 행복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드는 한 가닥의 찬란한 햇살이 좋았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생명일 수 있게 하는 바탕이 그 햇살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뭇잎 없이 햇살은 그저 햇살일 뿐이다. 광합성에 생각이 이른 건 그래서였다. 나뭇잎이 아니고서는 이 땅의 어떤 생명체도 햇살에 담긴 생명력을 잡아챌 수 없다. 나뭇잎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다시 짚어볼 수밖에. 



생명의 원리를 살펴볼 차례였다. 겉표지가 누렇게 바랜 『종의 기원』을 끄집어낸 건 그래서였다. 권장 도서 목록을 해치울 의무감으로 젊은 시절에 눈으로만 할짝대던 다윈의 책에서 생명의 근원을 되짚어 내려 안간힘을 쏟았다. 나무를 관찰하고 글로 쓰는 중에 빠진 퍼즐의 한 조각이 조금씩 메워지는 듯한 뿌듯함이 일어났다. 다윈의 진화론은 린 마굴리스의 공생 이론으로 이어졌고, 그 사이에는 윌슨, 도킨스, 굴드의 진화생물학이 끼어들었으며, 미생물과 더불어 살기 위한 지혜를 얻고자 목숨 걸고 사투를 벌인 과학자들의 과학사 공부가 보태졌다. 세상의 생명이 끝나지 않는 한 끝날 수 없는 생명 공부다.

팬데믹 사태로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머뭇거려야 했던 시기에도 나는 나무 그늘에 들어섰다. 한 줄기 햇살을 이 땅의 모든 생명이 생명일 수 있는 근원으로 변환하는 나뭇잎의 위대한 신비를 다시 떠올렸다. 모든 생명의 시작인 햇살에 담긴 신비로운 생명력을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나뭇잎의 위대함을 들어올렸다. 새로 펴낸 책 『나뭇잎 수업』을 서둘러 쓰게 된 까닭이다. 시집에서 시작해 식물도감을 거쳐 다윈에게로 되돌아온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파란 하늘, 붉은 태양 맞으며 다시 나무 찾아 길 위에 오른다. 가방에는 방금 도착한 새 시집 한 권을 챙겨 넣었다. 지금 떠나는 이 길도 시처럼 음악처럼 행복하리라.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솔숲닷컴(solsup.com)을 통해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라는 사진 칼럼을 연재하며 나무 이야기를 나눈다. 지은 책으로 『나무가 말하였네』,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천리포수목원의 사계』, 『나뭇잎 수업』 등이 있다.




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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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저 | 다윈 포럼 기획 | 장대익 역 | 최재천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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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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