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해나 “품이 넓은 어른이 될 때까지”
『빛을 걷으면 빛』 성해나 저자 인터뷰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조화롭게 어울릴 만한 제목을 붙이고 싶었어요. ‘빛’의 속성을 품은 따듯하고 환한 제목을 짓고 싶었고요. (2022.06.09)
“지금 한국에서 세대 간의 차이와 갈등, 그리고 소통에 대한 문제를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작가”(문학평론가 박서양)라는 평을 받으며 단정하고 진중한 언어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일구어나가는 신예 작가 성해나의 첫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이 출간되었다.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즈」를 통해 “정형화된 인물을 탈피해서 (…)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균형 잡힌 시각이 신뢰를 주기에 충분”(심사위원 구효서, 은희경)하다는 평과 함께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삼 년 동안 활발하게 써온 작품 가운데 여덟 편을 선별해 실었다.
성해나의 소설에는 “누군가를 함부로 이해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다정”하고 “품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던 작가의 당선 소감이 고스란히 묻어난 듯한, 편견과 오해를 넘어 서로를 올곧게 바라보려 노력하는 인물들이 있다. 서로 다른 세대와 소속, 신체적·정신적 차이, 나아가 자신과 타인이라는 근본적인 경계에도 불구하고 저 너머의 상대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은 그 등불 같은 믿음을 품고 길을 나선다.
등단 후 삼 년 만에 첫 책을 묶게 되었어요. 출간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감격,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이 흔치 않은데, 출간을 기다리며 그런 말을 자주 썼어요. 책이 묶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처음 경험해 더 그런 것 같아요. 주변에 출간 소식을 전하고 싶어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려요.
등단 당시 당선 소감으로 "다가오는 새해엔 다를 거라 믿는다"고 말씀하셨었는데, 그때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혹은 그때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새해가 될 때마다 품이 넓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요. 하지만 쉽지 않네요. 아직 품이 넓은 어른은 되지 못했지만,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작품 활동을 막 시작했을 때는 좋은 소설을 쓰고 싶은데 글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제 한계와 기량에 관해 많이 고민하곤 했어요. 그때 저는 제게 너무 가혹했어요. 인물을 그릴 때도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많이 했던 것 같고요.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여전하다고 여기면서도 이전과 다른 무게를 느낄 때가 있어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습득해갈 때, 주눅들거나 겁내지 않고 써내려갈 때. 여러 편의 소설을 쓰며 저 자신에게, 타인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진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래 쓰다보면 언젠가는 품이 넓은 어른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수록작을 표제작으로 정하지 않고 '빛을 걷으면 빛'이라는 새로운 제목을 붙여주셨는데, 제목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조화롭게 어울릴 만한 제목을 붙이고 싶었어요. ‘빛’의 속성을 품은 따듯하고 환한 제목을 짓고 싶었고요.
「화양극장」을 쓰며 차도하 시인의 「조찬」이라는 시를 읽었어요. ‘빛을 걷어내면 또다른 빛이 있다’는 시구에 마음이 동했고, 그에 영감을 받아 그 문장을 변형한 대사를 소설에 썼어요.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 차도하 작가님에게 그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더니 감사하게도 흔쾌히 허락해주셨어요. 빛이 지닌 투명함과 따스함, 그 안에 내포된 희망이 제 소설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의 작업 환경은 어떤가요? 책상 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가방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랩톱으로 작업을 해요. 거북목 방지를 위해 (이미 충분히 진행된 상태지만) 거치대 위에 랩톱을 얹어두고 글을 써요. 고요한 작업 환경을 원하기에 소설을 쓸 때는 젠하이저사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사용합니다. 저음이 풍부하게 전달되는 헤드폰이라 재즈나 클래식을 들을 때 유용해요. 제 책상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필수품이에요. 책상 오른편에는 쳇 베이커의 사진과 포스트잇이 잔뜩 붙은 미니 보드가 있어요.
포스트잇의 문구는 때마다 바뀌는데요, 지금은 ‘소설 쓰기는 한밤중에 운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오로지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만큼만 볼 수 있지만, 그런 방법으로 여행지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E. L. 닥터로의 말이 붙어 있어요. 가방은 잘 들고 다니지 않아요. 대신 주머니에 그날그날 필요한 것들을 넣고 다녀요. 해서 주머니가 늘 불룩하답니다.
작품 속에서 <오즈의 마법사> <동경 이야기> 등 다양한 영화들이 언급되는데요, 각 수록작과 함께 보면 좋을 듯한 작품이 있다면 추천을 부탁드려요. 예를 들면 「괸당」과 <지슬>, 「화양극장」과 <동경의 황혼> 등...
노아 바움백의 영화를 좋아해요. 「OK, Boomer」의 경우 <위아영>과 <오징어와 고래>의 영향을 조금씩 받았어요. (<오징어와 고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한 편이랍니다.) 함께 보면 즐거울 것 같네요. 노아 바움백뿐 아니라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들도 제게 큰 공명을 줘요.
<하얀 리본>을 특히 좋아하는데, 평화 속 은밀하게 깔리는 폭력,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잔혹성이 잘 드러난 영화라고 생각해요.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을 읽고 나서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언두」를 쓸 때는 이길보라 감독님의 작품들을 보고 읽었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는 영화도 좋지만, 책으로 읽으니 더 좋아 요즘도 생각날 때마다 꺼내 읽어요.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유독 애정을 느끼는 인물이라든지, 작가님과 닮아 있는 인물이라든지, 의외의 이유로 의외의 인물을 골라주셔도 좋아요.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애틋하지만, 굳이 꼽아야 한다면 「당춘」의 ‘두루’와 ‘헌진’이에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저 역시 공공기관에서 발열 체크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울을 난 적이 있어요. 불안과 조급 속에서 한 시절을 보낸 적도 있고요. 지금은 많이 놓여났지만, 한때는 누구나 흔하게 하는 ‘이십대는 고된 시기’라는 말이 난폭하게 들리기도 했어요.
「당춘」은 우리의 ‘처음’을 응원하고, 늦더라도 차츰 나아가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써내려간 소설이에요. 영식 삼촌이, 괸돌마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두루와 헌진도 가까운 미래엔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이번 소설집으로 처음 만나는 독자분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려요.
「오즈」를 발표하고 칠십대 독자 한 분께서 소설이 참 좋았다는 메일을 주신 적이 있어요. 소중한 경험이었고, 식어 있던 마음에 온기를 지펴준 글이었어요. 그때 받은 힘을 오래 간직한 채 다른 소설들도 쓸 수 있었어요. 독자분들의 마음은 저를 더 쓰게 해주는 것 같아요.
소설집이 출간된 후에는 더 다양한 독자들과 만나볼 수 있겠지요. 제 소설을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고 기다려져요. 즐겁게 읽어주시고, 그 감정과 느낌이 저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마음껏 평을 남겨주시면 좋겠어요.
*성해나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오즈」로 당선되며 등단. 글을 쓸 때마다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감을 느낀다. 그것이 좋아 글쓰기를 시작했고,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깊이 쓰고, 신중히 고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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