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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기억의 여행 - 『너였구나』

그림책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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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을 처음 만난 날부터 종종 “공룡은 누구일까”, “왜 찾아왔을까”하고 물었다. 물론 책의 후반부에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나만 어른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공룡이 학창 시절 친구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2022.06.08)


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인생의 테마가 만들어진다. 직업도 결국 삶의 테마 중 하나지 싶다. 반대로 추상적인 테마도 있다. 사람마다 평생토록 사로잡히는 감정의 테마도 있다. 원한 건 아니겠지만 평생‘외로움’을 테마로 삼고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감정을 감추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일관하며 살았는데, 이를 깨달은 건 ‘기억’ 때문이었다. 나의 기억력은 참으로 형편없었다. 서른이 훨씬 넘어 다른 사람에 비해 추억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실은 기억력이 부실하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살았다.



전미화의 『너였구나』를 책장의 좋은 자리에 오래도록 모셔둔 것도 이 그림책이 내 생의 테마인 ‘기억’을 다루고 있어서다. 전미화 작가의 그림책을 한 권이라도 만난 사람은 알 테다. 작가가 얼마나 아픈 이야기를 담아내는지를. 사고로 아빠를 잃은 아이의 일상을 보여준 『씩씩해요』부터 집 없이 자동차에서 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먹먹하게 그린 『다음 달에는』까지 읽고 나면 돌멩이를 삼킨 듯 몸이 무거워진다. 『너였구나』 역시 가볍다고 말할 수 없는 그림책이다. 그럼에도 좀처럼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작가의 그림책 중에는 가장 몽환적인 작품이다.

어느 날 처음 보는 공룡이 난데없이 찾아온다. 다소 촌스러운 복장을 한 공룡은 서슴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짐을 푼다. 공룡은 먹성은 너무 좋고, 잠을 잘 때 코를 골고 이를 갈며 방귀를 뀐다. 공공장소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큰소리로 깔깔거리고 울고 웃기를 거듭했다. 설마 이렇게 교양 없는 공룡을 알고 지냈던가 싶을 무렵 나는 참다못해 묻는다, “너 누구야?” 이 소리에 실망한 공룡은 그 좋아하는 밥도 안 먹고 벽을 바라본 채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다. 미안한 마음에 함께 놀이동산에 갔던 날, 콜라를 마시다 말고 공룡은 자신이 사는 곳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룡이 사는 마을에서는 누구든 언제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 여행이 시작되려면 그러나 기억이 필요하다. 

이 그림책을 처음 만난 날부터 종종 “공룡은 누구일까”, “왜 찾아왔을까”하고 물었다. 물론 책의 후반부에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나만 어른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공룡이 학창 시절 친구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공룡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공룡은 지금으로부터 2억 5천만 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초에 지구상에 등장했다. 지금껏 존재했던 가장 거대한 동물이었고, 그 전에도 그 후로도 공룡군 같은 동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멸종 이후 공룡은 화석과 뼈로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공룡 도감과 <쥬라기 공원>과 애플 TV의 <선사시대: 공룡이 지배하던 지구> 같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추측할 뿐이다. 분명 존재 했으나 사라졌다. 나의 추억도 말하자면 공룡과 다를 바 없다. 분명 존재했으나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다.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그들은 공룡일 수밖에 없다. 아주 가끔 옛날 사진을 찾았을 때, 추억의 노래나 영화를 보았을 때, 『너였구나』를 읽을 때 추억의 봉인이 열린다. 그때 딸깍하고 스위치가 켜져 방 안이 밝아지듯 공룡 마을에서 누군가 여행을 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오로지 형편없는 기억력만을 탓했다. 어릴 때 겪었던 수많은 일도, 중학교 때 친구들의 이름도, 함께 근무했던 동료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기억력 부진이 문제라 여겼다. 그렇지만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잊어버린 걸까. 누군가와 헤어지면 언제나 관련된 물건과 기억을 신속하게 버렸다. 덩달아 추억도 사라졌다. 내가 애당초 버리려던 건 아픔과 고통과 자책의 기억들이었다. 한데 슬픔의 기억을 버리자 즐거움의 기억도 함께 사라졌다. 슬픔은 빼고 기쁨만 기억한다는 전략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림책의 속표지에는‘티켓’이라는 글자가 적힌 작은 매표소가 보인다. 판매원도 행선지도 출발시간표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어떻게 여행을 떠나야 할지 아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티켓을 발행하는 사람은 우리다. 우리가 기억해야 그들이 온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너였구나』를 펼치는 순간 우리는 티켓을 끊게 된다. 비록 아프고 서러울지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공룡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너였구나
너였구나
전미화 글그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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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미화(어린이책·출판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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