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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다정한 기다림 - 『눈아이』
그림책 『눈아이』
포근한 상상력의 작가 안녕달의 그림책 『눈아이』도 다정한 기다림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2022.05.25)
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기다리는 건 믿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 몸을 움츠리면서도 봄을 기다리는 건 봄이 온다는 걸 믿기 때문입니다. 해가 떨어지고 하루가 끝나갈 때, 따뜻한 밥을 해놓고 사랑하는 이들을 기다릴 수 있는 건 그들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아이들이 제 길을 찾아가리라는 걸 믿어야 아린 걱정 속에서도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의 전제는 믿음이고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기다리며 많은 것을 견딥니다. 괴롭지만 달콤하고 어렵지만 설레게 하는 기다림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릴 뿐 아니라 나를 기다려 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좀 더 안도하고,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아주 따뜻하고 다정합니다.
포근한 상상력의 작가 안녕달의 그림책 『눈아이』도 다정한 기다림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한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뽀득뽀득 소리를 내는 눈사람을 만납니다. 정확하게 말해 아직 눈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둥글게 굴린 두 개의 눈 덩어리가 붙어 눈사람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아이는 수업 내내 생각합니다. 뽀득거리며 움직이는 그것이 진짜 눈사람이었을까 하고요. 수업이 끝나고 아이는 드디어 눈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눈사람을 진짜 눈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눈을 둥글게 굴려 손을 만들어주고, 발을 만들어 주고, 눈과 귀와 입을 그려 넣어 줍니다.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된 눈사람은 자신도 놀랐다는 듯 ‘우아우아우아우’라는 감탄사를 끝도 없이 쏟아냅니다. 우아우아라는 감탄사가 그림책 페이지에 가득찹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추운 겨울 한 가운데에서 아이와 눈 아이의 따뜻한 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아이는 배고픈 눈 아이에게 눈 빵을 만들어주고 눈 아이도 아이에게 눈 빵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눈 아이에게 맛있는 눈 빵이 아이에게는 차갑습니다. 아이가 넘어진 눈 아이를 일으켜 아픈 곳을 ‘호’하고 불어주면 눈이 녹아 눈물처럼 내리고, 아이가 손을 잡으면 아이의 따뜻한 온기에 눈 아이는 또 녹아내립니다. 어쩔 수 없이 그만큼 둘은 다른 존재입니다. 하지만 “왜 우냐”는 아이의 말에 눈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따뜻해서.”
두 존재의 다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지만 둘의 우정이 그 균열을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둘은 빨간 장갑을 한 짝 씩 나눠 끼고 겨울 토끼를 쫓아다니고, 눈썰매를 타며 한겨울 내내 신나게 놉니다. 하지만 날은 따뜻해지고, 눈사람은 점점 녹고 흙이 묻어 더러운 몰골이 됩니다. 그때 눈사람이 묻습니다.
“내가 더러운 물이 되어도 우리는 친구야?”
아이는 답합니다.
“당연히.”
아름다운 절정의 장면입니다. 아이는 둘의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 눈사람을 데리고 응달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눈의 계절의 끝에 다다랐다"는 문장처럼 이들의 시간도 끝이 납니다.
아이와 특별한 존재와의 만남, 우정, 그 환상의 시간을 담아낸 전형적인 서사의 결말은 대부분 멋진 환상의 시간 끝에 결국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납니다. ‘눈사람’하면 떠오르는 레이먼드 브릭스의 『눈사람 아저씨』도 그렇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진 날, 아이는 자신이 만든 눈사람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날아 북극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눈사람과 산타를 만나 한바탕 신나게 놉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환상의 밤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깨어나 보니 눈사람은 모두 녹아 사라져 버리고 없습니다. 이는 성장서사의 전형적인 구조입니다. 많은 성장담에서 주인공 아이들은 환상의 탐험을 하고, 현실로 돌아와 한 뼘 성장하죠. 그렇게 현실을 딛고 뚫고 나가는 것이죠.
하지만 그림책 『눈아이』의 아름다움은 이전의 많은 이야기들의 ‘끝’에 해당하는 그 시간에 다시 제2막을 시작합니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는 어느 날 아이와 눈사람은 서로 헤어질 시간임을 직감하고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그리고 하나, 둘, 셋…열. 아이가 눈을 뜨자 눈사람은 사라졌고, 세상은 파릇한 봄이 돼 있습니다. 갑작스런 장면 전환은 매우 드라마틱한 먹먹함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아이는 눈아이와의 만남을 어느 한 날의 아름다운 과거, 그저 기억으로 묻어두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계절을 통과하며 기다립니다.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날 둘은 드디어 다시 만납니다. 누군가를 만나 특별한 존재가 되고, 믿음을 주고받고, 그 믿음으로 기다리고, 그렇게 관계를, 우정을, 사랑을 지켜나갑니다. 기다리고, 기다려주는 것, 기대하고 기대를 받는 것, 다정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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