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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젤 커리, 이상적인 미래를 설계하다

덴젤 커리(Denzel Curry) <Melt My Eyez See Your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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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동체의 선봉장이란 운명을 짊어진 덴젤 커리, 고독한 무사를 뒤따르는 진군의 발구름이 거대한 모래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2022.05.18)


2020년 말 공개된 그래미 어워드 후보 선정에 불쾌함을 내비친 건 그 해 차트를 휩쓸었음에도 명단에서 제외당한 위켄드만이 아니었다. 예술성 짙은 디스코그래피로 꾸준히 매체의 관심을 받아왔던 플로리다 출신의 래퍼 덴젤 커리 역시 노미네이트 세례조차 누려보지 못해 “앞으로 구린 노래만 만들 것”이라며 많은 동료들과 함께 분개를 표했다.

그러나 그 울분의 결론은 삐딱한 탈선이 아닌 올곧은 탈태다. <Melt My Eyez See Your Future>라는 타이틀부터 변혁의 지향점이 명확하다. 은근히 아프리카계를 인정하지 않는 음악 업계처럼 미국 사회엔 여전히 인종 차별이 만연하다. 명예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상처 입은 영혼은 더 이상 그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시야의 제한을 누그러뜨려 이상적인 미래를 설계하고자 한다.

굳은 의지를 실체화하는 주체는 새로 확립한 영화적 자아 '젤 구로사와'다.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종족이자 그의 애칭이기도 한 '젤트론'과 일본 필름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를 조합한 인격체는 시대극의 캐릭터들을 적극 참조하여 고질적인 불평등과 맞서 싸운다. 서부극 대표 배우 존 웨인을 오마주한 'John Wayne'은 자기방어를 위해 집어 든 리볼버의 방아쇠를 연신 당기며 불만을 토로하고, 억압받던 주변인들을 구원하려 분투하는 'Zatoichi'는 맹인 검객 자토이치의 육신을 빌려 브레이크 비트 위에서 날렵한 랩 검술을 휘두른다.

동서양의 정기를 고루 흡수한 방랑자는 보다 입체적인 융합을 도모한다. 특히 영국 작곡가 키스 맨스필드의 'The loving touch'(1973) 속 허밍이 메아리치는 'Walkin'은 정교한 프로듀싱의 집약체다. 드럼 본연의 투박한 리듬으로 시작한 곡은 이내 하이햇과 베이스에 의해 잘게 쪼개지며 공정하지 못한 사법 제도의 현주소를 맹렬히 고발한다. 샘플링을 통한 신구의 조화, 동부를 대표하는 붐뱁부터 나고 자란 남부에서 체득한 트랩까지의 장르 전환, 완급 조절로 극대화한 임팩트 넘치는 메시지 전달까지 목표로 삼은 모든 것을 단 한 곡에 압축하며 응어리진 감정을 황홀히 털어낸다.

피아노나 여성 코러스 같은 요소들이 흩뿌려진 전후반부의 압도적 몰입감에 비해 앨범 청취를 견인하는 중반부의 퍼포먼스는 어딘가 겉돈다. 내레이션으로 끝을 맺는 'Mental'의 경건한 무드 직후에 흥겨운 멜로디와 외설스러운 단어를 등장시켜 집중을 흩트리는 'Trouble'이 단적인 예다. 뚜렷한 후렴구와 다양한 뮤지션의 의견이 공존하는 'Ain't no way' 또한 단독 싱글로서의 흡인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이유로 전체의 결속을 약화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약간의 부조화는 존재하나 작품의 가치를 입증하는 건 결국 아티스트의 진취적인 자세다. 펀치 라인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Imperial>, 내면의 공황을 풀어낸 콘셉트 기획 <Ta13oo>, 가족과 고향에 대한 찬가 <Zuu>에서 익힌 제작 방식을 신보에 아낌없이 쏟아냈고, 줄곧 고수해오던 스타일이 아닌 재즈적인 터치까지 덧입히며 음악적 역량을 한껏 끌어올렸다. 나아가 개인을 넘어 국가 전반의 병폐를 하나하나 짚어낸 담대함은 부패한 세상과의 작별이자 온전한 독립 영역 구축을 향한 결의다.

속세와 동떨어진 황야는 고요하다. 그러나 시각을 포기하고 참회와 헌신으로 무장한 사나이의 길에는 적막을 깨는 행진의 울림이 가득하다. 한 공동체의 선봉장이란 운명을 짊어진 덴젤 커리, 고독한 무사를 뒤따르는 진군의 발구름이 거대한 모래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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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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