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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엔 다 읽겠지] 다시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
<월간 채널예스> 2022년 5월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의 책은 상실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 폐허가 된 과거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2022.05.04)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유난히 눈을 뜨기 힘들어 겨우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해 보지만, 온종일 일도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쉽지 않은 날.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일과를 마치고 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찍 잠자리에 들지만, 그런 날이면 유독 새벽까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곤 한다. 몸이 마음속에 응어리진 감정에 저도 모르게 반응했던 탓이다. 그건 때로는 가벼운 불안이고 외로움이며, 때로는 무거운 절망과 우울감이기도 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타래를 따라가다,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선다. 밤새 생각에 잠길 바에는 일어나 움직이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이왕이면 휴대폰은 멀리하는 편이 낫다.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물 한 잔 오래 마신 후 잡히는 대로 책을 골라 읽는다.
책에도 온도가 있다면 이 책은 몇 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깊은 심해에 빠진 것처럼 주변엔 아무도 없이 오롯이 혼자인 채 온몸이 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바다는 온데간데없고 햇볕에 데워진 모래사장 위를 맨발로 걷는 듯한 기분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날 내게 준 것은 정신을 바짝 들게 하는 차가운 냉기와 얼어 있는 손끝을 녹이는 따뜻한 온기 모두였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제에 걸맞게 한 과학자의 생애와 그 생애를 파헤치는 저자 룰루 밀러의 시선을 통해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리는 저자를 따라 19세기 어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주장한 세상의 진리를 만나고, 혼돈 앞에서도 굳건하게 질서를 구축해갔던 그가 어떻게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히게 되었는지 또한 알게 된다. 혼돈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저자와 함께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너머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밀러가 과학을 통해 삶을 이야기했다면,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이미 쓰인 역사를 다시 한번 거꾸로 읽음으로써 역사를 통해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시민이 30여 년 만에 다시 쓴 이 책은 20세기의 결정적인 장면 11가지를 가려 뽑았다. 거기엔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나 러시아 혁명처럼 이미 오래전 종결된 사건들도 있지만, 히틀러의 독일이 안겨준 혐오와 차별, 핵전쟁의 위협처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사안들도 있다.
20세기의 끝에서 책은 우리에게 지난 100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는다. 절망스럽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과 폭력은 끊이지 않는다. 기후위기는 내일을 기대하기보다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무너져 가는 세상 앞에서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를 낙관할 수 있을까.
불안과 외로움이 가시지 않는 날. 절망과 우울감이 주는 무게에 짓눌린 날. 쓰러져 내린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막막한 나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의 책은 상실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 폐허가 된 과거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때론 냉정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과학과 역사가 알려준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라는 점은 언제나 놀랍다. 알고 있던 세상이 뒤집어진 뒤 찾아온 것은 오히려 희망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늪에 빠진 것 같던 밤이 구원되었던 순간이었다.
활자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이 구원이 될 수 있냐는 질문만큼 낙관하긴 어렵겠다. 하지만 힘겨운 하루를 지나고 있는 내게 위안을 준 건 바로 책이었다. 머리맡에 놓인 이 작은 서재. 혼돈 속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세계. 지나온 과거가 다시 현재와 만나 빚어내는 한 폭의 빛. 그러니까 죽기 전에, 다시 용기를 내 희망을 노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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