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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K열 19번]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야” - <태어나길 잘했어>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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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의 영어 제목은 “The Slug”, 민달팽이다. 집도 없고 체액을 흘리면서 움직이는 곳마다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기며, 아주 느린 속도로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 민달팽이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춘희다. (2022.04.28)



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사람 사이에서 사람으로 사는 건 아득한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어떤 암묵적인 룰을 공유하고 있고 나만 홀로 그 룰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산다는 것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런 기분에 짓눌리는 날에는 종종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나는 바닥에 누워있는데 머리 위 천장이 한도 끝도 없이 멀어지고, 어느 순간 전지적 천장 시점이 되어 바닥에 붙어 있는 나를 내려다보게 되는 그런 꿈이었다. 위에서 바라본 작은 나는 천장과 바닥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공허에 짓눌려 무한히 납작해지고 있었다. ‘아득하다.’ 그때마다 느꼈던 기분이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나를 지배했던 정서는 창피함이었던 것 같다. 나로 사는 것이 창피했다. 요령 없이 아둔한 편이었고, 몸은 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나의 당황을 이해해주는 이도 잘 없었다. 종종 “돼지”라고 놀림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어깨를 동그랗게 말아 가능하면 몸을 작게 만들었다. 내 몸 속에 내 몸을 구겨 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깨가 구부러졌다. 사람들이 다 저마다의 비밀과 곤란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걸 이해하게 된 지금에는 예전처럼 내가 부끄럽진 않다. 그러나 그 수치심이 남긴 신체적 특징은 여전히 나와 함께이다. 

얼마 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기분을 다시 느꼈다. 최진영의 <태어나길 잘했어>가 상영되는 극장 안에서였다. 눈칫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집 부엌의 싱크대 앞에 선 채로 등을 구부정하게 말고 발에서 땀을 흘리며 컵라면을 먹고 있는 중학생 춘희의 뒷모습이 너무 아득했다. 스크린 속 춘희 위로 천장이 한도 끝도 없이 높아지고 있는 듯싶은 착각이 들었다.

<태어나길 잘했어>의 영어 제목은 “The Slug”, 민달팽이다. 집도 없고 체액을 흘리면서 움직이는 곳마다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기며, 아주 느린 속도로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 민달팽이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춘희다. 

춘희의 몸은 다한증에 갇혀 있다. 손과 발에서 계속 땀이 흐르는 것이다. 종이를 적실 정도로 흥건하게 배어나오는 체액은 그저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건 타인에게 거부감을 주고 춘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춘희의 몸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다한증에 갇혀 있다. 그러나 춘희를 소외시키는 것은 이렇게 뜻대로 작동하지 않는 땀샘만은 아니다. 영화에서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춘희는 경제난으로 인한 가족 동반자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족 살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기도 하다. 춘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왜 그때 너만 살아남았냐”는 질문은 집요하게 그의 심장을 부여잡고 자책감을 짜낸다.


영화는 성인이 된 춘희의 시간을 따라간다. 춘희는 마늘 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한증 수술비를 모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길에서 벼락을 맞는다. 죽다 살아난 춘희는 겨우 겨우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눈앞에 중학생 시절 춘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절 춘희는 부모를 잃고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외삼촌네 가족은 춘희만 쏙 빼고 자기들끼리 갈비를 먹고 들어올 정도로 야박하게 구는 사람들이다.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춘희의 발바닥은 눈치 없이 늘 땀을 흘렸고, 땀발자국을 보며 외삼촌은 “더러우니까 닦으라”고 타박을 줬다. 외삼촌 가족의 언행은 수치심의 오라가 되어 춘희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춘희는 그 시간들을 다 살아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지나치게 비관하지 않으면서, 때때로 즐거운 순간들을 만들면서 살아온 것이다. 예전에 민달팽이가 복숭아를 먹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달팽이는 작은 이빨 같은 것을 드러내고 아주 천천히, 지치지도 않고, 오물오물 자기 몸체만한 복숭아 덩어리를 옴싹 먹어치웠다. 그 근성에 매혹되어 몇 번을 돌려봤는데, 스크린 속 춘희도 그랬다. 씩씩하고 선선하게, 차근차근 살아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나왔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벼락과 함께 갑자기 춘희 앞으로 되돌아왔다.

영화는 두 개의 춘희가 살아가는 두 개의 시간대를 섞으면서 지금/여기에 공존하게 만든다. 중학생 춘희의 시간은 단순한 플래시백이 아니다. 그가 성인 춘희의 시간으로 간섭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외삼촌 가족들이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간 뒤 춘희 홀로 지키고 있었던 낡은 양옥집은 춘희들의 시간이 중첩되어 지금의 춘희가 내일의 춘희를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그 집에서 지금의 자신을 만든 그 시절의 상처와 대면한 춘희는 이제 중학생 춘희의 시간대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영화의 끝, 성인 춘희는 중학생 춘희의 시간대에 스며들어 중학생 춘희를 감싸 안는다.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을까? 춘희의 연인인 주황은 “안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춘희도 그렇게 했다. 나는 모르겠다. 아직도 어린 나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저 어른이 된 춘희의 말에서 위로를 받을 뿐이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야. 태어나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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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문화평론가,『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문화평론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프로젝트38 연구원.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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