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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정한 그림책] 다정한 대답 - 『나와 다른 너에게』
그림책 『나와 다른 너에게』
“왜 뭐든 다 같이 해야 해?” 그림책 『나와 다른 너에게』는 덩치 큰 토끼의 이런 질문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2022.04.20)
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아시아권 사람들이 여럿 둘러앉은 만찬 식탁에서 일본인들 셋만 한 손에 밥그릇을 들고 먹는 모습에 깜짝 놀라 ‘왜 저렇게 먹어?’ 혼자 속으로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풋고추를 쌈장에 찍는 제게 고향이 다른 친구 하나가 수저를 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똑같이 물은 적도 있어요. “왜 그렇게 먹어?” 자기는 꼭지를 따고 그쪽부터 쌈장에 찍어 먹어왔다고요.
살다 보면 어느 날 우리 곁의 누군가, 내가, 이렇게 묻는 때가 생기는 법이지요. “왜 그렇게 해야 돼?” 하지만 이런 상황이 개인적 사회적 문화 차이에서 벌어지며 상대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곧바로 자각하기는 힘듭니다. 아주 온건하게 “나하고 그토록 다르다니, 정말 놀라워!” 라고 감탄한다 쳐도 그 생각의 바탕에는 ‘그건 아니지, 내 방식이 옳고 합리적이야’, ‘당연히 내 방식을 따라야지!’ 같은 아집이 깔려있기 십상이지요.
“왜 뭐든 다 같이 해야 해?” 그림책 『나와 다른 너에게』는 덩치 큰 토끼의 이런 질문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느 눈부신 아침, 떡갈나무 언덕에 사는 토끼들이 밤을 보낸 굴속에서 오르르 뛰어나와 언제나처럼 평화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참인데 말이지요. 잠이 덜 깬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덩치 큰 토끼는 잘 잤냐고 다정하게 묻는 굴토끼 하나에게 느닷없이 엄청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 모두는 함께 움직여야 되느냐고요.
“오줌도 같이 누러 가고, 냇물도 같이 마시러 가고.”
“낮잠 시간에 망보는 것까지 같이 하잖아.”
얼핏 게으른 자가 투덜대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산토끼는 지극히 합당하고 지당한 실존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셈입니다. 오글오글 무리지어 다니는 굴토끼들 사이에서 표나게 덩치 큰 이 친구는 태생적으로 잘 달리게 다리가 발달된 산토끼였으니까요.
잠깐 이 그림책이 원래 제목 그대로 ‘산토끼와 굴토끼(Le lièvre et les lapins)’ 이야기라는 점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수많은 그림책의 주인공이 토끼이고,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갈등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또한 흔하고 흔한 주제인데도 이 그림책은 더없이 독특한 매력을 뿜어냅니다. ‘토끼는 토끼인데 너무도 다른 두 토끼 이야기’로서 말이지요. 토끼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산토끼와 굴토끼는 사람이 봤을 때 비슷한 토끼일 뿐 유전적으로는 별개의 종으로 여길 만큼 생태 조건과 행동이 다르다고 합니다. 이종 토끼들의 특성에 착안해 ‘나와 다른 너’ 이야기를 만든 것은 너무도 멋진 아이디어라고 거듭 감탄하게 됩니다.
산토끼는 그날 아침 따라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계속 떠오르는 걸 멈출 수 없습니다. 굴토끼들이 늑대에게 어미를 잃은 자기를 거두어 다른 새끼들과 다름없이 키웠다는 것, 자신이 그들을 형제자매 가족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대체 왜 그렇게 온종일 답답하게 떡갈나무 언덕에서만 오글오글 무리지어 전전긍긍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산토끼의 근육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토록 두려운 늑대가 달려든다면 후다닥 달아나면 되는데!’ 그럼에도 산토끼는 굴토끼들의 놀이며 질서에 순응합니다. 밤이 되자 산토끼는 언제나처럼 굴토끼들과 함께 떡갈나무 뿌리 사이 굴속에 커다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잠들고, 머나먼 곳으로 숨이 턱에 닿도록 실컷 내달리는 꿈을 꿉니다.
혼자 신나게 내달리기 좋게 발달된 몸을 우두커니 세운 산토끼와 대조적으로 오글오글 무리지어 한 덩어리로 뛰어노는 굴토끼들의 역동적이고도 리드미컬한 이미지는 나중에 벌어지는 중요한 사건의 복선으로 작동합니다. 흑연 색연필 과슈 같은 전통적인 채색 도구를 사용하는 작가 티모시 르 벨이 장인적 솜씨로 표현한 개체와 개체들의 집합이 움직이는 무채색 장면 하나하나가 독자의 눈길을 오래 붙들지요. 정확하고도 생생한 동세와 세부 묘사는 이 흑백 그림책의 이야기를 더없이 풍성하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산토끼의 존재적 질문 ‘저 친구들은 왜 저렇고, 나는 왜 이래? 우리는 왜 같고도 달라?’는 다음 날 아침 혼자 물을 마시러 간 개울가에서 스스로 답을 구하게 됩니다. 우연히 만난 다른 산토끼와의 대화가 마치 거울을 보며 주고받는 자문자답처럼 문제의 핵심을 일깨워 주지요. 왜 산토끼가 굴토끼들과 함께 지내느냐는 질문에 엄마 잃은 어린 생명의 내력을 털어놓던 주인공은 이따금 굴토끼들이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합니다. 그리고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 산토끼의 정체성을 경험하게 되지요. 산토끼라면 당장 달려야지, 라고 새 친구가 권하는 대로 한바탕 달리면서 자유와 모험을 맛보는 겁니다.
산토끼보다 빨리 달리는 동물은 없으니 늑대 걱정 말자며 깊은 숲속으로 뛰어들었던 두 친구는 그러나 늑대떼를 만나는 바람에 끔찍한 위기를 맞닥뜨립니다. 과연 무엇으로 반전을 이룰지,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 이제 앞쪽에서 켜켜이 쌓아뒀던 복선이 작동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덩치가 어마어마한 짐승의 출현! 그리고 “왜 뭐든 다 같이 해야 해?”에 대한 대답으로 독자는 이 엄청난 덩치의 정체를 확연히 알아봅니다. 모험을 통해 한껏 성장한 산토끼는 그래서 더욱 마음깊이 사무치는 다정한 대답을 듣게 되고요. 진정으로 뭐든 다 같이 하고 싶은 형제의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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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테 르 벨> 글그림/<이세진> 역 11,700원(10% + 5%)
‘나’를 지키며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법 “우리는 서로 닮았지만, 조금 다른 점도 있는 것 같아. 이제 진짜 너에 대해 가르쳐 줄래?” 떡갈나무 언덕에 사는 토끼들은 뭐든지 함께하기를 좋아해요. 물 마시러 갈 때도, 오줌 누러 갈 때도, 심지어는 잠잘 때도요. 그런데 모든 토끼들이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