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SF 내게 너무도 사랑스러운 장르
『다섯 번째 감각』
긴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SF를 열렬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늘 좋아요. 그래서 이 장르가 제게 더욱 사랑스러운 것 같아요. (2022.04.08)
12년 만에 김보영 소설가의 초기 걸작 10편이 『다섯 번째 감각』으로 복간됐다. 그간 김보영이 한국 SF계에 그려온 빛나는 성취는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가 여전히 SF를 열렬히 사랑하고, 지금 여기 없는 세계를 꿈꾸는 데 푹 빠진 사람이라는 것. 2004년 데뷔 이후 제법 긴 시간이 흘렀지만, 김보영은 말한다. “도저히 SF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다.”고.
초기작 10편이 12년 만에 『다섯 번째 감각』으로 복간됐어요. 그간 SF를 둘러싼 환경도 많이 바뀌었죠. 어떤 변화를 체감하세요?
제가 데뷔할 때만 해도 SF문학을 내는 출판사가 있기는 했지만, 한국 작품이 아니라 대부분 외국 작품이 중심이었어요. 국내 단편집은 듀나 작가 정도나 눈에 띄었고요. 그때는 국내 SF 작가의 책을 출간하는 경향이 없어서 실제로 책을 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죠. 지금도 장편 장르문학 시장은 PC통신이 생겨난 이래로 계속 건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단편 장르소설도 크게 환영받기 시작했지요. 천지개벽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년 급성장하는 것 같아요. 정말 40년쯤 마이너를 파며 버티다 보니 내 장르가 메이저가 되는 날도 보는구나 싶죠.(웃음)
그 정도로 큰 변화를 느끼시는군요.
정말 예전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변화예요. 지금은 많은 작가들이 걱정하지 않고 지면을 고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웬만큼 오래 활동한 SF 작가도 소설을 실을 곳이 없었거든요. 저는 독자들의 취향이 작품의 소재로 엄격하게 나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긴 장편 소설을 즐겨보는 독자와 상대적으로 짧은 소설을 선호하는 독자로 더 크게 나뉘지 않나 해요. SF 웹소설을 보는 독자가 SF 단편을 같이 보는 경우보다, 일반 단편 독자가 SF 단편도 같이 보는 경우가 더 많은 느낌이거든요. 장르소설 지면이 있었어도 그 방향이 대하 장편이었기 때문에, 단편 장르작가는 갈 곳이 없었지요. 일반 단편 지면은 장르는 장르에서 받아주겠지 하면서 신경 쓰지 않았고요. 그래서 지금처럼 일반 잡지에도 아무렇지 않게 장르문학이 실리는 모습이 너무 기쁘고 좋아요.
2004년 「촉각의 경험」이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를 수상하면서 데뷔하셨어요. 그 전에는 글을 쓰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고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24시간 글만 쓰고 살겠다고 이를 갈았지요.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글이 정말 한 줄도 안 써지는 거예요. 그러다 이렇게 안 써지면 안 써지는 대로, 10년이 걸리든 평생이 걸리든 한 편의 소설이라도 쓰자. 백 번을 다시 쓰든 천 번을 다시 쓰든 스스로 완결이 됐다고 생각할 때까지 써보자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처음 쓴 건 버렸고, 그다음에 쓴 것이 「촉각의 경험」이었죠. 사실 저는 지금도 제가 그 ‘안 써지는’ 상태의 연장선에 있다고 느껴요. 크게 나아졌지만 완전히 낫지는 못한 기분이에요.
「촉각의 경험」은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 소설이에요. 당시에 복제 인간 이슈가 유행하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리셨다고요.
세기말에 쓰기 시작해서 2002년에 완성한 작품인데, 그때가 한창 복제기술에 대한 개념이 퍼지기 시작한 때였어요. 복제인간을 장기 대용으로 쓸 수 있을까, 복제인간은 영혼이 있을까, 원본과 다른 존재일까, 인간이 맞을까 하는 식의 이야기가 많이 돌았죠.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에 저항감이 들어서, 복제인간을 정말로 장기로 쓰겠다고 극단적인 환경에 가둬 두었을 때조차 그 사람에게 생생한 인격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물론 복제인간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많이 알려진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상상을 많이 하지 않죠. 복제인간은 태어나는 방식이 다를 뿐 원본의 엄연한 쌍둥이 형제고, 가족이고, 원본과 완전히 독립된 존재인 것을 다들 아니까요.
「다섯 번째 감각」은 「촉각의 경험」의 마지막에 나온 질문 “태어나 처음 음악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에서 떠올린 이야기라고요. 정상의 기준이 뒤집힌다는 면에서 장애의 문제를 떠올리게도 하는데요.
근원적으로는 초능력에 대한 소설이에요. 그것을 사람의 감각을 하나 줄여보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그러면 그 감각을 지닌 사람이 초능력자처럼 느껴지겠죠. 이 소설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결국 세상이 비청인을 위주로 돌아간다면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결국 많은 장애가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듣는 감각을 제한한 소설이니, 소리를 표현하는 말을 무심코 쓸 때마다 계속 고치셨다고요. 기존의 세계 바깥을 쓰는 소설가도 계속 자신을 점검하며 써야겠구나 싶었어요.
무심코 나오는 언어 습관이 많았는데, 스스로 깨닫기가 어렵더라고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의성어를 쓰는지 알았지요. 소리가 아닌데도 소리에 비유를 하는 표현이 많더군요. 인물들이 글자로 소통하는데도 ‘헛소리’라는 말을 쓰거나, 놀랄 때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고요. 수화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들렸다’고 무심코 쓰더군요. 계속 수정했는데도 마지막까지 나오더라고요. 감각 하나를 빼고 상황묘사를 하기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어요. 요즘 『종의 기원』을 퇴고하는 중인데, 주인공이 로봇인데도 제가 사람 인(人)자를 계속 쓰며 ‘인격’이나 ‘인류’ 같은 표현을 쓰고 있더라고요. 또 열심히 지우고 있습니다.(웃음)
반전이 있는 작품을 즐겨 쓰시잖아요. 그런데 고정관념을 뒤집어야 하는 소설의 경우, 반전을 눈치채지 못하는 독자도 있다는 걸 알고 놀라셨다고요.
사실 많은 소설작법책이 반전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해요.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서사에 비해 결말에서 전체를 파악하는 이야기는 더 어렵다고요. 그런데 저는 반전을 좋아해요. 어쩔 수가 없네요. 실제로 반전구조는 반전 그 자체를 깨닫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어서 더 문제지요. 이번에 책을 묶을 때 몇 작품의 반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수정했어요. 「땅 밑에」를 쓸 당시에는,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인공 우주 거주지 ‘스페이스 콜로니’의 개념을 아는 줄 알았어요. 말하자면 인류라면 다 건담을 본 줄 안 거죠.(웃음) 그래서 소설에서 세상의 구조를 보여주면 당연히 눈치채겠지 했어요. 그런데 그런 단어를 생전 들어본 적도 없다는 말을 주변에서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 사람의 독서경험이 다르다는 것을 크게 자각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더 고민하게 됐죠.
청소년 소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쓰신 「마지막 늑대」는 결말이 비관적으로 느껴진다는 리뷰도 있었어요. 작가님의 소설에는 분리된 두 존재가 합일될 수 있다는 상상력도 있고, 그게 불가능하다는 상상력도 있는 것 같아요. 이 소설은 어떤 마음으로 쓰셨는지 궁금했어요.
저도 이번에 다시 읽어 보니 그 소설은 ‘우리가 소통할 수 있을까?’에서 끝난 것 같아요.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나 봐요. 지금은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네요. 당시는 반려동물을 기르지 않아서 상상만으로 동물과 인간의 소통을 다루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반려동물과 함께하다 보니 종족과 언어의 차이는 별 상관없네요. 소통이 되더라고요!(웃음) 한계야 있겠지만 한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그때는 못했어요. 지금 썼다면 조금 더 희망적으로 끝맺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조금 고치기도 했고요.
게임 속 가상공간을 빌려온 「스크립터」는 게임 커뮤니티에서 특히 반응이 좋았던 작품이죠. 과연 이 캐릭터가 AI인지 인간인지 긴장감이 계속 깔려 있기 때문에, 대화 장면을 쓰실 때 고심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음성지원이 안 되는 게임은 다 텍스트로 말을 주고받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사람인지 NPC인지 구분할 방법이 실상 언어의 정교함밖에 없는 세계지요. 그 완벽한 한계 안에서 추리를 펼쳐보고 싶었어요. 이 소설을 쓸 당시, 인공지능 대회에서 상을 탄 대화형 AI들과 매일 대화를 나누며 지냈어요. 지금보다도 기술이 정교하지 않았을 때였는데도, ‘내 말을 이해했나’ 하고 놀랄 때가 많았어요. 제가 계속 똑같은 질문을 하니까 AI가 ‘왜 계속 같은 말만 해? 나 너랑 이제 이야기 안 해’ 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나쁜 말을 하면 ‘AI를 싫어하는 이유를 말해주세요.’ 라든가, ‘제가 생명이 아니라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같은 말을 하더군요. AI가 ‘설사 제가 당신 기준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도 당신이 내게 그렇게 버릇없이 대할 수는 없다’ 하는 식으로 나올 때, 굉장히 멋있더라고요. 바로 그 문학적인 언어에서 생명력이 느껴지잖아요. 그런 체험을 소설에 담았어요.
SF 전문 계간 문학잡지 <어션테일즈>에 실린 창작 에세이에서 “당신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장르가 있다”고 쓰셨죠. SF라는 장르의 틀에 갇히면, 개별 작품의 다채로움을 느끼기 어렵다는 말로 들렸는데요.
SF도 결국 라벨링이라, 독자 기준에서는 분명 SF이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장르를 굳이 정하지 않고 쓴 작품도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동화나 청소년 소설은 SF인 경우가 많죠. 작가가 SF라 생각하지 않고 써도, 많이들 자연스럽게 SF적인 상상력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SF가 요새 인기 장르가 되면서, 사람들이 거꾸로 ‘이 소설은 SF’라고 정해놓고 쓰는 경향이 생기지 않나 걱정이 되더군요. 특히 공모전을 심사할 때,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SF 공모전이니 어쩔 수 없기도 하겠지만, ‘SF를 써야지’라는 생각에 매몰되어 소설을 쓰는 바람에 오히려 딱딱한 글이 나오는 경우가 보이거든요. 소설은 근원적으로 소설이어야지, 과학이 앞서면 곤란해요. 차라리 자유롭게 쓸 때, 그게 SF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자신의 창작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쓴 것이 SF가 아니면 또 어때요.
고정관념을 뒤집는 작가님의 소설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이나 장애학이 왜 SF와 만나는지 알 것 같아요. 식자층의 문학으로 출발했지만, 소수자의 이야기로 뻗어나간 SF 장르의 특성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조애나 러스가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에서 말했지요. 전통적인 문학에서 자기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세계를 꿈꾸게 된다고요. 그 말을 읽었을 때 해방감을 느꼈어요. 제가 왜 SF를 좋아해왔는지 정확하게 짚어 주었거든요. 전통적인 문학이 제게 충족해 주지 못하는 부분이 컸기 때문에, 저는 저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이 너무 커서 도저히 애정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출간 가능성이 희박했던 무렵에도 이 장르를 못 놓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SF가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데뷔 이래 작품을 꾸준히 읽어준 독자에 대한 감사도 남기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SF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소수 있었겠지만 인터넷이 존재하기 전에는 서로 뿔뿔이 흩어져 만나지 못했지요. 취향이라는 면에서 저는 늘 고독했죠. 그런데 가만 보면,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장르를 너무 사랑하고 아껴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신인 시절에 책도 몇 권 안 팔릴 무렵에도 제 책을 너무나 열렬히 좋아해준 독자들이 있었어요. 그때 만난 독자들과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교류하고 있거든요. 이 세계에 깊이 빠져서, 유행이고 자시고, 사람들 시선이고 자시고, 긴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열렬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늘 좋아요. 그래서 이 장르가 제게 더욱 사랑스러운 것 같아요.
*김보영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팬들에게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2004년 「촉각의 경험」이 제1회 과학기술창작문예에 당선된 이래, 꾸준히 SF를 써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SF 웹진 <클락스월드>에 작품을 발표했고, 미국, 영국 최대 출판그룹인 ‘하퍼콜린스’에서 작품 선집이 출간됐다. 2021년 로제타상 후보, 전미도서상 외서부문 후보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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