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 특집] 과학책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 번역가 노승영
<월간 채널예스> 2022년 4월호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과학적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번역가에게 과학책은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독자가 백 명이면 해석도 백 가지인 인문·사회·문학 분야의 책과 달리 과학책은 대체로 참과 거짓이 분명하거든요. (2022.04.04)
번역가 노승영을 만났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말처럼 과학적 태도일지 모르겠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지만 대학원에서는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과학책 번역에 영향을 끼쳤나요?
과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제가 과학을 잘 알 거라 오해하여 과학책을 많이 의뢰하는 것 같아요. 오해를 굳이 바로잡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과학책을 번역하면서 과학에 대한 교양이 점점 쌓여가는 것 같긴 합니다.
전문 지식이나 용어가 많은 과학책 번역만의 특징이 있나요?
학회들이 홈페이지에 올려둔 용어집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과학책, 특히 생물학 책은 검색이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료 찾는 데 시간을 많이 써야 합니다. 예전엔 모교 도서관에 동문 회원으로 가입하여 논문을 즐겨 열람했는데, 어느샌가 혜택이 사라져버렸더군요. 요즘은 논문을 참고하지 못하니 눈앞의 텍스트만 가지고서 내용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과학책 번역에서 오역 검수나 편집자의 수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감수자가 따로 있는 경우도 많고 때로는 추천사를 부탁받은 분이 오역을 지적해주기도 합니다. 편집자가 해당 분야에 정통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제가 번역하는 과학책은 대부분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쓴 것이라서 어느 정도 과학 교양을 갖춘 편집자라면 어색한 부분을 능히 잡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번역을 의뢰받으면 머리말과 1장 번역 원고를 맛보기로 보내는데 그 과정에서 출판사의 맞춤법 및 편집 방침을 미리 파악해두면 편집자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설마 편집자의 일거리를 빼앗는 것은 아니겠죠?)
『말레이 제도』처럼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책이나, 새로운 발견에 관한 과학책을 번역할 때의 설렘이 있나요?
돌이켜보면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릴 때보단 두려움에 쿵쾅거릴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고스란히 대변한다고, 나의 문장이 누군가를 온전히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뿌듯하거나 으쓱할 때도 없진 않지만, 그런 감정을 경계하는 편입니다. 번역자가 저자 행세를 하는 것은 (이를테면 번역서에 사인을 한다든지) 왠지 호가호위하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자연, 생태에 관한 책도 번역하셨습니다. 이 분야의 책들을 번역하며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번역 중인 책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테니스 에세이 『끈이론』을 번역할 땐 테니스 라켓을 장만했고,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의 북유럽 이야기 『시간과 물에 대하여』를 번역할 땐 북유럽 신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로빈 월 키머러의 『향모를 땋으며』를 번역하다가 세 자매(옥수수, 콩, 호박)를 함께 키우면 좋다는 걸 알고서 곧장 씨앗을 구입하여 화단에 심었습니다. 제임스 웨슬리 롤스의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 같은 책은 다시는 맡고 싶지 않습니다. 인류의 종말을 곱씹다가 우울해져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거든요. 제가 그동안 번역한 책들을 책꽂이에 전부 꽂아뒀는데, 어쩌면 그 책들은 제 몸에도 새겨져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번역한 과학책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책과 가장 힘들었던 책은 무엇인가요?
대개는 힘들었던 책일수록 번역하고 나면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책은 ‘지금 번역하는 책’입니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소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때』를 번역하고 있는데, 아무리 공부해도 이해되지 않는 양자 역학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입니다. 니체 말마따나 죽지 않고 더 강해진다면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 되겠지요.
자신만의 과학책 번역 노하우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생물 이름을 번역할 때 무작정 일반명으로 검색하는 게 아니라 일단 학명을 찾은 다음에 그 학명으로 검색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번역 시작하고 몇 년 지난 뒤에야 이 방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밖의 영업 비밀 공개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게요.
독자로서, 번역가로서 과학책의 매력은 뭘까요?
요즘 들어 과학책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것 같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진영을 초월하여 의견을 교환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과학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소통의 마당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니까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과학적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번역가에게 과학책은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독자가 백 명이면 해석도 백 가지인 인문·사회·문학 분야의 책과 달리 과학책은 대체로 참과 거짓이 분명하거든요. 어떤 면에서 이것은 묘한 위안이 됩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건 옳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번역을 마치고 앞으로 출간 예정인 과학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번역을 끝낸 과학책으로는 에이드리언 베잔의 『생명의 물리학』,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나무 내음을 맡는 열세 가지 방법』,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 케이트 크로퍼드의 『AI 지도책』이 있습니다. 아직 편집 들어갔다는 소식은 듣지 못해서 언제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독특한 관점과 재미가 있는 책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노승영 『헤겔』, 『마르크스』, 『새의 감각』,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생명의 물리학』, 『약속의 땅』, 『바나나 제국의 몰락』, 『유레카』 등 지금까지 인문·사회·자연 과학 분야를 넘나들며 100권 가까운 책을 번역했다. 『향모를 땋으며』는 아름다운 번역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말레이 제도』로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선정 한국과학기술도서상 번역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박산호 번역가와 함께 쓴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이 있다. 홈페이지(socoop.net)에서 그동안 작업한 책들의 정보와 정오표, 칼럼과 서평 등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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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스 에디터. 결혼과 함께 귀농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 빡세게 적응 중이다. 지은 책으로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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