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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의 엉뚱한 장면] 한없이 투명한 ‘수학의 시간’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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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그림자를 완벽히 지운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순진하게 보이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투명함에 ‘수학적 용기’를 심어두려는 것 같다. (2022.03.24)


남다은의 엉뚱한 장면 : 작품의 완성도 혹은 작품 전체에 대한 감상과는 무관하게 특정 장면이 엉뚱하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은 대개 영화의 큰 줄기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장면이 관람자의 사적인 경험을 건드릴 때 일어나는 것 같다. 영화의 맥락에 구애받지 않은 채, 한 장면에서 시작된 단상을 자유롭게 뻗어가 보려고 한다.


수학자를 주요 인물로 내세우는 영화들에 거의 언제나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안경을 쓴 수학자가 골똘한 표정으로 커다란 칠판 한가득 공식을 적어 내려가는 모습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나는 그런 장면에 자주 사로잡히곤 한다. 당연히 칠판을 채운 공식을 이해하는 것도, 그에 대한 수학자들의 설명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지만, 마치 문장처럼, 음표처럼 나열된 숫자와 기호는 고유한 리듬으로 춤을 추는 것만 같아서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칠판 하나 마주하고 그 공식을 불러내는 수학자들의 단순하고 정확한 행위를 통해 거기 생성된 문자들의 행렬은 기이하게 아름답다. 그런 장면들이 펼쳐내는 수학의 세계, 혹은 형식의 미학에 매번 주목하게 되는 건 그것이 어린 날 내가 겪은 수학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 수학은 언제나 어렵고 부담스러운 과목이었다. 수학 실력이 변변치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수학이 안긴 숨 막히는 갑갑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떠한 문제에도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 정답 아니면 오답 둘 뿐인 명백한 인과론의 질서 안에 나만의 새로운 답을 창조해낼 수 없으며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애초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무래도 신나지 않았다. 물론 그 생각이 주입식 교육이 낳은 수학에 대한 편견에 기인함을 지금은 알지만, 그때 지겹게 외우고 푼 수학 공식과 문제는 일련의 영화들에서 맛본 독창적이고 짜릿하며 어딘지 낭만적이기도 한 수학의 운동성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 수학이 실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수학자들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수학의 일상적 효용과 관계없이 영화의 환영 안에서 경험한 그 세계의 어떤 상태를 동경한다. 미지의 규칙 안에서 무해하고 무용하게, 그러나 맹렬하게 활동하는 상태. 물론 이는 수학에 무지한 자의 천진한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탈북한 수학 천재 이학성(최민식)과 고등학생 한지우(김동휘)가 밤마다 모이는 과학관 B103은 그런 환영으로 충만한 장소다. 한지우는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자사고에 입학했지만, 수학 성적이 오르지 않아 걱정이 크다. 강남에서 사교육을 받는 동급생들과 달리, 그는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일반고등학교로 전학을 고심하던 차, 그는 우연히 학교 경비원으로 일하는 이학성의 수학 실력을 알게 되고 그를 졸라 특별 수업을 받기로 한다. 학교라는 제도의 시간이 닫히고 나서야 열리는 둘의 밤, 둘의 장소는 경쟁으로 삭막한 낮의 교실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돈은 필요 없고 달콤한 딸기우유 하나면 배움이 가능하다. 이학성이 고물상에서 사온 조명들 몇 개가 낡고 어두운 과학관에 빛을 밝힌 순간, 현실과 제도의 속도로부터 분리된 온화하고 올바르며 정직한 B103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정답이 아니라 답을 찾는 과정이 중시된다. 효과적이고 민첩하게 답을 도출해내는 방식 대신,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풀고 또 풀며 문제와 ‘친해지는’ 과정을 존중한다. 지능보다는 노력을, 노력보다는 용기에 가치를 두며, 수학적 용기는 곧 담담하고 꿋꿋하고 여유로운 태도라고 말한다. 수학은 무기 제조에 이용되지 않고, 대학입시를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다만, 수학은 선율이 된다. 이학성이 박보람(조윤서)과 함께 오래된 피아노 앞에 앉아 원주율 숫자가 적힌 노트를 악보 삼아 ‘파이 송’을 연주하는 대목의 경이로움은 숫자의 연속이 음악으로 전환된다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된다. 아니, 수학에는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음악이 이미 잠재되어 있다는 점을 이 순간이 증명한다.

말하자면 B103은 오직 수학의 윤리와 미학만으로 풍성해진 시공간이다. 이곳은 세상의 해악과 모순으로부터 보호받는 진공의 장소다. 탈북민 이학성의 고통스러운 개인사나 동급생들과 구별되는 한지우의 계급, 자본과 위계로 지배되는 현실은 여기서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학성이 처음 공표한 대로 그런 ‘사적인’ 질문을 애초 꺼내지 않아야만 이곳의 이상적인 시간은 유지된다. 그 상태는 회피이기보다는 수학이라는 정밀한 사고 체계에 서정을 불어넣으며 수학의 환영을 착하게 고양해보려는 영화의 선택으로 보인다(이학성의 아들이 플래시 백으로 등장하는 후반부의 톤과 내용이 다소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그 거친 플래시 백은 B103 장면들이 지켜낸 환영을 별다른 장치 없이 현실의 극단적인 설정과 접합하려고 하는데, 그 시도는 무리하게 느껴진다). 

영화의 결말도 그 환영의 연장선에 있다. 이학성과 한지우가 재회하는 해외의 연구실은 따뜻하고 무해한 B103보다 더 새하얗고 산뜻하다. 그곳이 어디인지, 그들이 어떤 시간을 거쳐 그곳에 이르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오직 칠판 하나, 딸기우유, 칠판을 채운 공식, 그리고 두 수학자만 남겨두고 B103의 환영을 타국의 어느 실내에서 더 환하게 확대해서 비춘다. 현실의 그림자를 완벽히 지운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순진하게 보이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투명함에 ‘수학적 용기’를 심어두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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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다은(영화평론가, 매거진 필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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