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의 뒷면] 어느 편집자의 ‘성덕’ 된 사연? - 『연구자의 탄생』
<월간 채널예스> 2022년 3월호
『연구자의 탄생』은 바로 10년 넘게 간직해왔지만 여러 사정으로 쉽게 구체화하지 못했던 마음을 펼쳐놓은 책, 다시 말해 ‘나만 알고 싶었던’ 블로거들과 선배들, 즉 오랫동안 ‘덕질’해온 동세대 연구자 선생님들을 한자리에 불러낸 책이다. (2022.03.04)
매우 신뢰하는 부장님이 퇴사를 한다고 했다.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이, 이런 상황에서는 마음이 흔들린다. 이러저러한 속내를 내비쳤더니, 부장님은 갑자기, 만들고 싶은 책은 다 만들어봤냐고 물었다. 그러고 덧붙였다. 그만두게 되더라도, 정말 만들고 싶었던 책들은 만들어보고 떠나라고. 아마도 내 부실한 기억력에 따르면 이 비슷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왜 편집자가 되었나?’
그때로부터 십몇 년 전. 여러모로 자부심 넘치던 인문사회 독자들에게도 ‘덕후’라는 말이 도착했다. 이 시기에 인문 덕후는 특정 학자나 관심 분야에 대해 준전문가 수준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을 칭했으며, 겸양과 자조의 표현인 동시에 경멸의 표현이기도 했다. 집중력과 끈기가 없었던 나는 덕후가 되기엔 애초에 탈락이라며 내심 다행으로 여겼지만, 그저, 이제 막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들을 따라다니기 좋아하는 소비자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블로그가 대세였던 시절부터 설렘과 감탄을 오가며 구독한 인문사회 블로거들이 있었다. 졸업 논문을 쓴다고 여러 논문을 뒤질 때,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유려한 글 솜씨로 논문을 술술 읽게 만드는 선배들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출판된 책뿐만 아니라 이러한 블로그와 논문들로부터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느꼈던 슬픔과 기쁨, 아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앎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이것은 내가 매료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싶다는 열렬함, 덕후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편집자가 되었다. 하지만 내 초심은 길은 잃고, 이 일을 관둬야 하나 고민하던 중, 대충 방치해놨던 덕후의 마음과 마주쳤다.
『연구자의 탄생』은 바로 10년 넘게 간직해왔지만 여러 사정으로 쉽게 구체화하지 못했던 마음을 펼쳐놓은 책, 다시 말해 ‘나만 알고 싶었던’ 블로거들과 선배들, 즉 오랫동안 ‘덕질’해온 동세대 연구자 선생님들을 한자리에 불러낸 책이다. 여기에 편집자로 일하면서, 글이 너무 좋아서 냉철한 직업인의 자세를 잃고 그 앞에서 덕후의 본색을 드러내버렸던 선생님들도 모셨다. 편집자의 특권 중 하나가 동경했던 이들을 저자로 만나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성덕’(성공한 덕후) 되기라면, 이 책을 통해 나는 또 한 번 성덕이 된 셈이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이 책의 콘셉트를 결정했다. 선생님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연구의 핵심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것, 이를 통해 인문사회 연구와 우리 사회의 변화도 생각해보는 것. 그런 취지에서 ‘왜 이런 연구를 하고 글을 쓰시나요?’라는 질문을 드렸는데, 선생님들은 조금 난처해했고 많이 어려워했다. 이는 논문이나 학술 단행본에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들로, 내가 눈치 없는 덕후의 위치에 있어서 가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덕심’을 믿어보기로 한 것인지, 선생님들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유한 스타일을 잘 살린 글을 보내주었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사회’와 ‘연구(글쓰기)’를 함께 붙들고 치열하게 고민해온 연구자들의 이야기에는 강렬한 울림이 있어서 나는 교정을 볼 때마다 ‘좋다!’를 연발했다.
그러고 보면 덕후의 쓸모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덕후가 열렬함으로 선을 넘을 때, 무모함과 과잉이 촉발하는 것들이 있다. 가끔, 누군가의 이상하지만 오랜 바람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번질 때 뭔가(예를 들면 이 책!)가 생겨나고, 덕후도 기존의 시야를 벗어나 ‘성덕’(성장하는 덕후)이 된다. 저자들, 독자들, 함께 일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편집자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조금은 성장했다고 느낀다. 사실, 편집자로 일한다는 건 이런 열렬함과 무모함과 놀라움의 연속이고, 나는 이 일을 좋아했다. 굳이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바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자신의 자리를 고민해온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것들을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 제목은 “연구자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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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편집자. 섬세한 감성과 편안한 배려가 환영받는 곳에서 눈치 없음과 불편함을 맡고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가난 사파리』, 『자살에 대하여』 등을 만들었다.
<김성익>,<김신식>,<김정환> 등저13,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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