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작가 정화영의 사람, 책, 영화 이야기
『서툴지만, 결국엔 위로』 정화영 작가 인터뷰
누군가를 위한 위로였지만, 결국엔 나를 위한 위로였다. (2022.02.15)
『서툴지만, 결국엔 위로』는 휴스턴국제영화제에서 2018, 2021년 두 차례나 다큐 부문에서 백금상을 수상한 작가 정화영의 에세이. 위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된 20개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다큐작가로 그리고 누군가의 딸과 엄마로 살았던 작가. 그녀의 인생 경험은 물론이고 위로에 관한 꼭 봐야할 책과 영화도 소개받을 수 있다. “위로받는 법도 잊어버렸고, 위로받을 시간도 잃어버렸다”는 지금의 우리에게 위로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책을 읽고 한 편의 휴먼 다큐를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큐 얘기를 안 할 수 없는데요. 다큐 작가는 어떤 일을 하는 분인가요? 일반 작가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원래 다큐 작가라는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방송 프로그램도 장르가 다양하다 보니 분야를 나눠 다큐멘터리를 오래 한 사람들을 다큐 작가라고 해요. 한국직업사전을 찾아보면 다큐멘터리 구성대본을 작성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거든요. 다큐 작가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기획부터 대본 작업까지 처음부터 끝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방송이 그렇겠지만 다큐 작가는 취재와 섭외 과정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을 매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최고의 전문가를 찾아 이야기를 듣고 공부해야 비로소 진짜 일을 시작할 수 있어요. 사례자를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고 인터뷰하면서 틀을 잡아야 비로소 구성안이 나오죠. 다큐멘터리의 매력은 여기서 나오는 것 같아요. 최전방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현장이 있다는 것. 거기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 나머지 과정은 다른 방송 작가와 비슷해요.
다큐 작가로서 가장 기뻤던 일이라면, 아무래도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으셨을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백금상 2회 수상이면 엄청 대단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깐 자랑 부탁드립니다.
자랑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네요. 그저 감사한 경험이었죠. 첫 번째 수상작(엄마의 봄날)은 책임 PD님이 주셨던 아이디어였는데, 소재가 탈북 이야기라 까다롭다고 조심스러웠어요. 다른 작가들은 부담스러워 피했던 아이템이었는데 열일곱 살 춘미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갔어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만남은 가끔 우리를 예상 못 했던 목적지로 안내하기도 하니까요.
두번째 작품(백 투 더 북스)은 자랑할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4부작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였는데 저는 그중에서 국내 편을 맡았거든요. 감사한 것은 국내에 의미 있는 서점들의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됐다는 것이고, 또 한 번 책을 사랑하게 됐다는 거죠.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생했던 시간을 위로받는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순수하게 직업인으로서 “다큐 작가가 내 천직이다”가 느껴지는 때는 언제인가요? 언제 가장 보람이 느껴지세요?
스페셜 기획 다큐멘터리를 하나 털고 나면 ‘피가 마른다’는 문장이 떠올라요. 흰머리가 몇 센티씩 솟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라 할까요? 다시는 하지 말자고 다짐까지 하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끝이 없다는 가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다큐멘터리 만들면 더 재밌겠다!’라고 또 외치고 있거든요. 많은 작가들이 레귤러 방송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건 새로운 걸 기획하는 게 힘들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저의 병은 기획하는 게 즐겁다는 거죠. 과정은 여전히 피가 마르는 것 같지만 처음 기획을 할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요.
이 책을 보면 책과 영화를 많이 언급하고 인용도 해주셨는데요. 다큐 작가는 평소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책과 영화를 많이 읽어야 하나요? 다큐가 갖고 있는 특성이 있어서 뭔가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큐 작가가 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과 영화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그건 다큐멘터리가 우리 삶에 닿지 않는 분야가 없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장르와 상관없이 흥미로운 모든 것을 마음으로 경험하시길 추천합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즐거움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그게 소설이든 영화든 상관없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그것도 상관없고요. 물론 다큐멘터리는 모두 실화죠. 실제 우리 삶에 있는 이야기에요. 궁금증을 따라가다 보면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는 픽션이 줄 수 없는 더 큰 감동을 우리에게 준답니다.
이제 책 얘기를 해볼게요. 이 책의 스무 개 에피소드는 모두 실화인 거죠? 책을 읽으며 작가님이 산전수전을 다 겪으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평소에도 책 속 여러 이야기처럼 후배들이 혹은 동료들이 작가님께 많이 의지하고 고민 상담도 하고 그런 건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가 없어서 제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런데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다가가긴 해요.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어깨를 쓰다듬게 되거든요.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마음 때문인가 봐요.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실제 경험한 이야기예요. 하지만 제 관점으로 느낀 것을 썼기 때문에 과장됐을 수도 있어요. 본인들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몇 개 에피소드는 몇 명의 이야기가 묶여 있기도 하고 섞여 있기도 해요.
무척 인상 깊었던 것이 “감정 쓰레기통이 되면 어때서?” “다른 사람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기 어려울 텐데, 작가님이 스스로 감정쓰레기통을 자임하게 된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 사연 같은 게 있는 건가요?
그 말은, 제가 이 글을 쓰고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이유였어요. 어린 후배가 아무에게도 아픈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요. 왜 그랬냐는 저의 질문에 ‘누구도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라고 했을 때, 슬퍼서 잠이 안 왔어요. 저도 모든 사람의 감정 쓰레기통이 될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얽혀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제가 얼마나 많은 관계를 이루겠어요. 핸드폰에 저장된 그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미약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누군가를 위로한 경험이 많고, 위로에 대한 책까지 내실 정도면 작가님이 갖고 계신 위로의 원칙 같은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글쎄요. 위로가 조언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위로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라고 답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위로할 때는 할 수 있는 걸 합니다. 같이 화내고 같이 울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차 마시는 거요.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딴 소리를 하면서 산책하고, 미술관에도 가고, 드라이브도 하죠. 햇빛을 더 많이 쐬고, 나무 냄새를 맡는 일. 흙 위에 서거나 바다 앞에 서는 일.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작아지는 우리를 경험하는 일. 그런 시간으로 위로를 대신하는 게 저에겐 익숙합니다.
가장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에피소드는 몇 번 어떤 이야기일까요?
공황장애를 경험했던 이야기요. 꼭지 제목이 ‘그것이 처음 찾아오던 날’이에요. 많은 이야기는 과거로 남아 있지만 저에게 찾아왔던 그것은, 아직도 저와 함께 있거든요. 알 수 없는 공포 같은 것이 저를 찾아올 때면 저는 또 시선을 주변 사람들을 향해 돌립니다. 저를 몰아세우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저는 저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을 찾아가야 하거든요.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그게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라고 믿고 싶어요. 타인을 돌아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의 슬픔을 덜어내는 것이요. 그게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세상에서 공평을 만들어가는 아주 작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책을 내기로 한 뒤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평범한 제가 삶의 이야기를 꺼내 놓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겠다는 생각이 부끄러웠죠. 그런데 제 브런치 댓글을 남겨 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마음이 찌르르하다는 짧은 문장에서 서로 모르는 우리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됐죠.
저의 브런치 이름은 ‘그로칼랭’이에요(로맹 가리의 소설 『그로칼랭』에서 가져옴). 존재하지 않을 커다란 비단뱀이 되어 힘껏 안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가져온 이름이었죠. 저의 문장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안아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미약한 저의 글을 보고 고된 삶에서 잠깐이라도 위로를 경험하셨다면, 다시 감사드립니다.
*정화영 고등학교 때부터 다큐멘터리 방송 작가가 꿈이었다는 정화영은 어떻게 보면 꿈을 이룬 사람이다. 혼자 자료 조사해서 썼던 생애 첫 기획안이 SBS TV문학상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우수상을 받으며 이른 시기에 메인 작가로 데뷔했다. 그 이후로도 상복은 이어져 2013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 2015년 KBS의 ‘우수제작진상’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8년 〈엄마의 봄날〉로 휴스턴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백금상(Platinum Remi) 수상을, 2020년 〈백 투 더 북스〉로 같은 상을 한 번 더 수상하는 영광을 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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