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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의 엉뚱한 장면] 삶을 씩씩하게 통과한 천진함 - <미싱타는 여자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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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 속 이들의 앳된 얼굴이 품고 있던 낙천성이 과거를 돌이켜보는 현재의 주름진 얼굴에도 보존되어 있다는 것. 그건 세상 물정에 무지한 표정이 아니라, 현실 가장 깊고 어두운 곳까지 들어갔다 상처투성이로 나오고서도 체념하지 않은 삶을 향한 천진함이다. (2022.02.10)


남다은의 엉뚱한 장면 : 작품의 완성도 혹은 작품 전체에 대한 감상과는 무관하게 특정 장면이 엉뚱하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은 대개 영화의 큰 줄기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장면이 관람자의 사적인 경험을 건드릴 때 일어나는 것 같다. 영화의 맥락에 구애받지 않은 채, 한 장면에서 시작된 단상을 자유롭게 뻗어가 보려고 한다.


독립 다큐멘터리 속, 투쟁하는 여자들의 현장에서는 특유의 웃음소리가 난다. 대형마트의 부당 해고에 맞서 계산대 옆에 자리를 깔고 버틸 때도, 톨게이트 캐노피에 올라 뙤약볕 아래에서 농성할 때도, 송전탑 건설을 막으려 산 중턱의 허름한 천막을 지킬 때도, 그러니까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도 그 활기가 너무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이어서 나는 자주 놀란다.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사소한 말에도 박장대소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그들이 가족을 떠나 모든 걸 걸고 싸움 현장에 남은 이들이라는 사실의 무게를 잠시 잊게 만든다. 그 쾌활함은 왠지 자유롭고 당당하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 딸로서 책임이 아니라 오직 같은 싸움을 시작한 여자들의 우정만이 여기 빛난다. 연령, 직업, 배경을 불문하고 ‘투쟁하는 여자들’의 결기에 잠재된 이 신기한 활기의 원천은 무엇일까. 종종 생각해본다. 적어도 영화 속 남자들의 농성장 장면을 보며 그런 느낌에 사로잡힌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미싱타는 여자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 대신 청계천 미싱 공장에 취직해 과업에 시달리던 그들의 나이는 고작 13살, 14살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뒤늦게 이 노동의 부당함을 알게 해준 근로기준법이었고,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쳐준 노동 교실이었다. 고단한 일과를 마친 후, 건물 앞에 들려 교실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노동자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위로해 주던 희망의 장소. 1977년 9월 9일, 그 장소가 퇴거 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경찰의 방어막을 뚫고 노동 교실로 들어간다. 그 희망을 사수하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결의로 온몸을 던져 저항한다. 이제 60대가 된 이들은 당시를 아프게 상기하며 “제2의 전태일이 되고 싶었다”라고 회고하지만, 영화 속 누군가의 말처럼 그들이 이미 “제2의 전태일이었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슬픔이 고단한 노동의 나날과 치열한 투쟁의 현장과 고독한 고립의 시간을 견뎌낸 여성들의 모진 과거에 기인한다면, 감동은 40여 년 전의 소녀들과 현재의 이들을 잇는, 주눅 들지 않는 어떤 기운들에서 비롯된다. 빛바랜 사진 속 이들의 앳된 얼굴이 품고 있던 낙천성이 과거를 돌이켜보는 현재의 주름진 얼굴에도 보존되어 있다는 것. 그건 세상 물정에 무지한 표정이 아니라, 현실 가장 깊고 어두운 곳까지 들어갔다 상처투성이로 나오고서도 체념하지 않은 삶을 향한 천진함이다. 이 천진함은 그러므로 대단히 강하다. 씩씩한 천진함으로 그들은 그 시절의 ‘우리’에 대한 기억과 그 ‘우리’를 가능하게 했던 어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도, 지금 카메라 앞에서도 이들이 잃지 않은 활기가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이들의 자존감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들은 과거의 장소로 돌아가 옛 동지들과 노래를 부른다. 그들 뒤에는 노동 교실을 다니던 소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찍은 커다란 흑백 사진이 놓여 있다. 중년을 훌쩍 넘은 여성들이 그날과 꼭 닮은 자세로 사진 앞에 자리를 잡고 활짝 웃는다. 사진 속 동료 중 많은 이들이 여기 없지만, 과거와 현재가 마주한 이 순간에 그들 모두가 여전히 함께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토록 힘겨운 시간을 지나 긴 세월이 흘렀어도 이 장면에 그대로 살아남은 웃음과 생기가 기적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까. 그런 생각에 한없이 뭉클해지다가 문득 그 기적을 현실에서 목도한 어느 날이 떠올랐다.

2021년 12월 31일. 한 해가 끝난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유독 어수선한 마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나설 때였다. 오후 다섯 시쯤이었을 것이다. ‘미싱타는 여자들’과 비슷한 또래 여성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멈췄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단지를 지나다 종종 마주치던 청소 노동자들이었다. 2021년 마지막 날의 노동을 마치고 함께 퇴근하는 길인 것 같았다. 한 여성이 무리와 헤어지기 직전, 이들의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우리, 새해에 다시 만나!” 그 합창의 기운이 어찌나 힘차던지 정말 내일이면 새로운 해구나, 라는 사실이 새삼 짜릿하게 각인되었다. 

그때, 혼자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 무리 중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선화 언니, 사랑해!” 두 손을 머리 위로 한껏 들어 하트모양을 만들며 그는 이 고백을 몇 번이고 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동료들이 어린아이들처럼 웃었다. 그들을 지나쳐 앞서 걸어가던 나는 그들의 모습을 두 눈에 온전히 담고 싶어 애가 탔지만 뒤돌아보는 일이 어쩐지 무례하게 느껴져서 대신, 있는 힘껏 귀를 열었다. 저 단순한 문장에 얼마나 무수한 삶의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을까. 

<미싱타는 여자들>에서 신순애는 노동 교실 신청서를 작성하던 날의 울림을 고백하는데,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7번 시다도, 1번 오야 미싱사도 아니라, ‘신순애’라는 이름을 처음 쓰던 순간, 비로소 노동자의 자부심도 시작되었다고. 12월 31일, 선화 언니와 그의 이름을 신나게 부르던 이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던 이들에게서 나는 반복되는 노동의 일상에 긍지가 깃드는 찰나를 보았다. 아니, 그 찰나를 빚어낸 여성 노동자들의 튼튼한 낙천성을 보았다. 2021년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을 상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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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다은(영화평론가, 매거진 필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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