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최재원 시인, 여기부터는 낯선 말의 세계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일상에서도 순간 이동하는 것 같은 감각을 많이 느끼거든요. 시를 읽을 때도 나와 다른 화자의 경험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음 시에서는 또 다른 경험으로 이동하는 순간을 좋아해요. (2022.02.08)
한 걸음 내딛으면 새로운 무대가 펼쳐진다. 최재원의 첫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를 펼쳤을 때, 순간 이동을 하는 감각을 느꼈다. 페이지를 넘기면 낯선 배역이 주어지고, 사투리와 은어가 들려온다. 다음 무대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궁금해졌다. 창원, 횡성, 뉴욕 등 여러 도시에서 자라, 물리학과 시각 예술을 공부했으며, 두 언어를 오가며 번역을 하는 시인은 왜 몸과 말을 계속 바꾸는 세계를 만들었는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지.
제목이 파격적이었어요.
사투리, 속어 등 표준어 바깥의 말에 관심이 많아요. 실제 말을 들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게 대부분의 삶이 표준어 밖에 있다면, 말의 구조 안으로 들어올 때 깎여나가는 건 뭘까. 그런 걸 자주 떠올리는 편이에요.
시를 쓰기 전에는 물리학과 시각예술을 공부하셨어요. 말 이외의 것을 찾아 헤맨 듯한 인상이 들기도 했는데요.
당시에는 생각과 말의 간극에 좌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마요네즈를 쭉 짜면 원래 형태가 어떻든 별표 모양으로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생각 자체는 무질서하고 덩어리로 존재하는데, 말이 되는 순간 형태가 달라져버리는 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반대로 수학과 물리는 모든 것을 한번에 포착할 수 있는 지도가 펼쳐진 느낌이었어요. 거기서 느끼는 안정감이 있었죠.
그런데 ‘말’을 다루는 시를 쓰게 됐군요.
어느 순간, 좌절하지 말고 표현을 해봐야겠다, 한번에 다 알지 못해도 괜찮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욕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번역 일도 하고 있어요. 시를 접한 계기도 번역이었다고요.
어렸을 때부터 영어랑 한국어를 같이 사용해서 모국어의 개념을 오래 생각했어요. 어떤 언어에도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유년 시절의 경험은 한국말로 떠오르는데, 고등학교 이후에 배운 것들은 다 영어로 존재하거든요. 그렇다 보니 경험이 바로 번역되는 게 아니라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 들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에 더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미지의 세계를 처음 탐험하는 것처럼요.
성형외과가 늘어선 강남의 거리 등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시 속에서는 낯설게 감각돼요. 실제로 시를 쓸 때는 어떤가요?
익숙한 것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좋아해요. 잘 아는 것이 갑자기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사물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될 때가 있잖아요. 오늘도 길을 걷는데 길 위에 새 동전이 보도 블록 위에 떨어져 있는 게 갑자기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럴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그 순간의 장소도 시에 들어오고요.
각 시들이 퍼포먼스 같았어요. 일관된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질적인 경험들이 튀어나와요.
독자에게 갑자기 낯선 경험으로 왔다갔다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일상에서도 순간 이동하는 것 같은 감각을 많이 느끼거든요. 시를 읽을 때도 나와 다른 화자의 경험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음 시에서는 또 다른 경험으로 이동하는 순간을 좋아해요. 그래서 일부러 대조적인 시를 배치해서 이질성을 극대화하려고 했어요.
띄어쓰기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글자를 배치한 것도 눈에 띄었어요.
말을 뜯어보고 해체하고 다시 붙여보는 과정이 제게는 중요해요. 덩어리로 존재하던 생각이 언어가 되는 입구를 찾는 과정이랄까요. 첫 시 「모 조」도 ‘모’와 ‘조’ 두 글자 중에 어떤 것이 더 ‘모조’의 느낌이 들어있나 생각하면서 썼고, 두 글자 중 어떤 것이 밀도가 더 큰가, 바다에 던져 넣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어요.
“시라는 장르로 생각하고 쓰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소설처럼 읽히는 시도 있고 연극 같은 시도 있는데요. 장르 바깥의 것을 시에 놓아보면서 재미를 느끼나요?
애초에 장르 구분을 안 하고 써요. 그냥 하나의 덩어리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깎아낼 것인가 덧붙일 것인가만 생각해요. 물론 완성한 후 저도 독자로서 의견은 있어요.(웃음) 그렇지만 이게 어떤 장르 같다거나 하는 느낌은 수정 단계에서 알아차리죠.
시집을 펼치면, ‘소리’로 가득한 시들을 만나게 돼요. 특히 소리를 내는 곤충 ‘매미’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절지 동물이나 곤충에 관심이 많아요. 포유류는 몸이 다 연결되어 있는데 절지 동물은 다리가 빠지기도 하고, 허물 껍데기가 남아 있다거나 하는 일이 많아요. 그 이질감에 두려움도 느끼지만 홀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매미를 밟는 순간, 인간과 매미의 몸이 뒤바뀌는 상상도 그래서 나온 거군요.
다른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어떤 일일까 늘 궁금해요. 그래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시를 쓸 때도 있고, 다양한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 같은 시가 나오기도 해요. 나와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언어는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면서 쓴 시도 있고요.
사투리를 쓰는 상황이 시에 등장하기도 해요.
맞아요. 사투리나 특정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에 관심이 많아요. 나랑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의식을 체험해보고 싶어서, 이질적인 언어에 늘 귀를 열어놓고 있어요. 사람마다 독특한 말투, 반복되는 표현이 그 사람들의 환경이나 신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시의 화자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구축되는 운동 같았어요.
알고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계가 불분명하죠. 지금 우리가 의자에 앉아있고, 사물과 사람이 분리된 것으로 느껴지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하나의 장에 에너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거시적으로 봤을 때 분리된 사물로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죠. 이 간극이 재밌어요.
몸이 다른 차원으로 상상되는 것도 좋았어요. 몸이 세포 다발이나 곰팡이가 핀 물질, 삼각형으로 표현되기도 하죠. 시인님에게 시는 몸이 또 다른 무언가로 감각되는 가능성 같기도 했는데요.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지만, 시를 쓰면서 몸과 친해지기는 한 것 같아요. 저는 삶이 비참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몸이 있다는 것도 제약이잖아요. 사회가 불평등하니까 더 비참해지는 것도 있고요. 그렇지만 계속 이대로 살 수만은 없으니까 삶의 비참에 불복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요.
시 쓰기가 그런 일 아닐까요?
죽음을 망각하고 현재에 완전히 집중할 때, 잠시나마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을 관찰하면서 시를 쓰거나, 시공간을 벗어나 다른 존재를 상상해보는 것이 제게는 그런 일 같아요.
(장소제공: 아로마티카)
*최재원 거제도, 창원, 횡성,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자랐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시각 예술을, 럿거스대학교 메이슨 그로스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2018년 Hyperallergic을 통해 미술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한영·영한 번역과 감수를 하고 있다.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제4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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