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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하루] 세상 발레 가기 귀찮아하는 사람의 발레 예찬론 - 이윤서

에세이스트의 하루 33편 - 이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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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 이외에도 에너지 소비할 곳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로지 나에게만 몰입하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취미로서 발레의 가치는 충분하다. (2022.01.26)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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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은 바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잡는다. 잡은 다리를 들어 올리고 귀 옆에 갖다 놓는다. 몸의 균형을 맞추고 발목 잡은 손을 내려 두 손으로 바를 잡는다. 버틴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선생님의 시범을 처음 봤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단 한 번도 귀 옆에 다리를 갖다 놓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기에, 거의 기인열전을 관람하듯 짝 짝 짝 박수 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이내 선생님의 충격 발언. 

“자, 이제 여러분 차례.”

취미로 발레를 시작한 지 1년이 됐다. 인터넷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발레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자세가 바르게 교정됐고, 굽은 어깨가 펴졌고, 키도 컸다’라는 발레 추천 글을 본 다음 날, 집 근처 발레 학원을 찾아갔다. 도장 깨기 하듯 필라테스도 해보고, 요가도 해보고, 개인 트레이닝(PT)도 받아봤지만, 3~6개월이 지나면 금세 흥미를 잃고 깔짝대다 그만뒀다. 앞서 거쳐 간 수많은 운동처럼 발레 또한 ‘프로 운동 깔짝러’에겐 새로이 도전해볼 만한 퀘스트 같았다.  

무모하게 발레 판에 뛰어든 이후 깨달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나는 생각보다 더 배가 나왔고, 다리를 다 펴고 다니지 않으며 엉덩이에 힘을 주지 못하는, 이른바 총체적 난국의 몸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허리를 다 펴고 꼿꼿하게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자꾸 허리 좀 펴라고 하시고, 숨도 못 쉴 정도로 배를 집어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더 조일 수 있다며 만족할 때까지 배를 콕콕 찌르신다. 선생님의 기준이 너무 야박한 거 아닌가 싶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봤더니 웬 엉덩이만 툭 튀어나온 구부정한 이가 어리바리 쳐다보며 나를 마주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근육만 어찌나 이렇게 가성비 좋게 써왔는지, 조금만 방심해도 평생 숨어 있다가 겨우 고개를 빼 든 근육이 쏙 들어가 버려, 다시 처음부터 잡아 빼내야 하는 불상사가 반복된다.    

보통 길쭉하고 가녀린 선을 지닌 발레리나가 아름답고 느린 선율에 맞춰 우아하게 동작하는 모습이 ‘발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영화나 공연 또는 유명 발레리나 인터뷰 속에서 발레를 접했을 때는 아름답다고만 여겼는데 1년 동안 갖은 지적을 받으며 직접 몸으로 부딪혀본 결과, 저들은 얼마만큼 수련했길래 저런 경지에 오르는 걸까 절로 존경심이 발휘된다. 발레는 정교한 움직임과 반듯하고 절도 있는 자세, 그리고 높은 강도의 인내심이 요구되는 예술이다. 빠른 동작보다도 느린 동작에서 더 세심하게 근육에 신경 써야 하고, 단순히 몸을 왔다갔다 움직이는 수준을 넘어서 미세한 부분에 오랫동안 집중하고 단련시켜야 우아한 백조의 날갯짓처럼 보일 수 있다.

해봤던 운동 중에 제일 힘든 운동이다. 가끔 이 악물고 버티는 걸 뻔히 아시면서 숫자를 지나치게 천천히 세거나 ‘8’까지 셌는데도 “스테이(stay)"라고 외치는 선생님이 야속할 정도다. 특히 퇴근길 지하철에서 발 딛고 서 있을 공간 한 칸 차지하겠다고 이리저리 치이다가 옷을 갈아입고 바로 발레를 가야 하는 날이면 잠시 ‘가지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럼에도 1년 동안 꾸준히 발레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이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일에, 앞에 켜켜이 쌓여있는 걱정을 하는 데 쓰다가 일주일에 두 번, 8시에서 9시 사이에는 한 동작 한 동작 깊은 호흡을 하면서 오로지 나에게만 몰입할 수 있으니 생각해보면 참 소중한 시간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를 걸어도 좀처럼 땀이 잘 안 나는 체질인데,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 내심 뿌듯하기도 하다.

앞에 놓인 바에 다리를 올려놓고 부들부들 떨던 ‘왕왕 왕초보’는 이제 손으로 발목을 잡고 어깨선 근처에서 부들부들 버틸 수 있는 정도인 ‘왕 왕초보’단계에 이르렀다. 배에 근육이 0에 수렴하여 학창시절 윗몸 일으키기 10개를 겨우 했던 나는 어느새 경쾌한 음악 리듬에 맞춰 윗몸 일으키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다리 스트레칭을 할 때, 직각 근처만 가도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의 심정이 100번 이해 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 다리는 이제 110도 정도로 그 각이 조금 넓어졌다. 이 나이에 키도 무려 2cm 넘게 커서 인생 최고의 키를 달성했다. 키 잴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배에 힘주고, 허리를 펴고, 목을 최대한 뽑아냈다. 그야말로 발레에서 배운 내용을 총동원하여 이루어낸 합작이다.

물론 발레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호리호리한 발레리나의 몸매가 되는 건 아니다. 1년이나 했지만, 여전히 나는 평균보다 작은 키에 50kg이 넘는 체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발레를 하면 적어도 구부정하게 앉아 있다가도 문득 배에 힘을 주고, 어깨를 펴면서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굽은 어깨로 살았을 땐 굽었는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꼭 잘하지 않아도 된다. 나 자신 이외에도 에너지 소비할 곳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로지 나에게만 몰입하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취미로서 발레의 가치는 충분하다.  




*이윤서

게으름을 다스리며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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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윤서(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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