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 이가라시 미키오 “합시다. 콜라보!”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이랑,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 인터뷰
어릴 때부터 이가라시 미키오의 만화를 읽으며 자란 이랑과, 이랑의 콘서트를 보면서 “흐르는 강물을 넋 놓고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는 이가라시 미키오. 팬데믹 시기, 일상을 가로지르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두 사람은 이별과 사랑, 신에 대한 질문을 담아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2021.12.28)
“합시다. 콜라보!”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통하는 면을 발견한 두 사람은 ‘콜라보’를 외쳤다. 뮤지션 이랑과 『보노보노』 작가 이가라시 미키오의 편지 에세이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의 시작이다. 어릴 때부터 이가라시 미키오의 만화를 읽으며 자란 이랑과, 이랑의 콘서트를 보면서 “흐르는 강물을 넋 놓고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는 이가라시 미키오. 팬데믹 시기, 일상을 가로지르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두 사람은 이별과 사랑, 신에 대한 질문을 담아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경험은 특별했을 것 같습니다. 히로카와 타케시 작가님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서도 이건 정말 이랑 작가님과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의 책이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책을 받아보시고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이랑 : 준이치와 보노보노를 닮은 해달이 손을 잡고 물 위에 떠 있는 그림이라니… 이것 말고 다른 표지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해달은 잠을 자는 동안 해류에 휩쓸려 멀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미역을 몸에 감고 자거나, 다른 해달의 손을 잡고 잔다고 하더라고요. 생존본능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참을 수가 없네요. 표지 그림이 나오자마자, 라인 메신저로 이가라시 상에게 보냈더니 “그레이트!!”라며 무척 기뻐했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지금껏 여러 권의 책을 내왔는데 제가 쓴 책의 표지 중에 가장 근사한 것 같습니다. 기쁜 마음에 받아들어 보니 예상보다 묵직하더군요. ‘이것이 이랑 씨와 내가 함께한 1년의 무게구나’ 하는 생각에 감회가 깊었습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궁금했어요. 이창동 감독이라는 접점이 있었네요. 두 분 모두 서로에게서 닮은 모습을 발견하신 것 같은데, 그 느낌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랑 : 십대 때부터, 『보노보노』 만화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매 권마다 바뀌는 등장인물 설명도 좋았고, 내용이 너무나 철학적이라 ‘어른을 위한 만화’라고 느끼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노보노』 만화책을 볼 때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느꼈습니다. 2019년, 일본 센다이에서 저와 이가라시 상 공통의 지인을 통해 직접 만나고 돌아와 이가라시 상의 에세이 『불꽃 소리만 들으면서』를 읽은 뒤, ‘이 사람은 나랑 뇌 구조가 똑같다’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이가라시 상에게 어떤 얘기든 겁내지 않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두 사람 다 이창동 감독의 팬이라는 점에서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셈이었죠. 그러다 일본에서 열린 이랑 씨의 공연을 보러 갔는데, 노래하는 목소리와 기타 소리가 제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흐르는 강물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바라보는 듯한 기분의 콘서트였습니다. 그 후, 이랑 씨가 폴짝폴짝 뛰어 저의 작업실로 놀러 왔고요.
편지가 오가는 동안, 그 여백을 라인이 채워주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분의 일상에서 편지 및 라인을 주고받는 리듬은 어땠나요?
이랑 : 편지를 쓰는 리듬은 체감상 한 달에 한 번 주기였던 것 같습니다. 편지를 보낸 직후나 받은 직후엔 항상 라인을 주고받았습니다. 서로의 편지를 빨리 읽고 싶어서 번역이 되기도 전에 번역기로 대강 읽고 간단하게나마 인상 깊었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중에 편지로 나눴던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생각이 날 때도 라인을 나눴고요. 이가라시 상에게 생일축하 영상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라인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이가라시 상은 라인 답장이 정말 빠릅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라인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연락 수단이었는데, 자동 번역을 경험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랑 씨의 메시지를 번역한 일본어 문장의 오역이나 오탈자는 금방 눈에 들어왔지만, 한국어로 옮겨진 제 메시지가 어떻게 번역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죠. 그래도 서로가 보낸 메시지의 잘못된 부분을 스스로 고쳐가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행위가 재미있었습니다. 책에 실을 때는 오역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고요.
가장 오래 시간을 들여 쓴 편지가 있었나요?
이랑 : 편지가 후반으로 갈수록 ‘익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쓰는 시간에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내용면에서 더욱 깊게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마지막 편지 두 편은 정말 몇 번을 읽어도 가슴을 깊게 울립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이랑 씨가 보낸 편지 속에 이미 제가 써야 할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혼자 글을 쓸 때보다 수월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시간이 오래 걸린 편지는 없었는데, 마지막 두어 편 정도 남았을 때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긴 했어요.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은 “무명인 사람들의 일생”(120쪽)을 그리고 싶다고 하셨고, 이랑 작가님은 ‘엑스트라’로 사라지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죠. 창작의 테마로 무명의 삶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랑 :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명’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하고 세상에 잘 들리는 이야기보다 세상에 크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삶의 이야기가 더 적은 것은 아니니까요.
이가라시 미키오 : 지금껏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예요. 그러니 누군가는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무명인 사람을 취재해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인간일생도권』에서는 제가 직접 무명의 사람을 창작해 그려가고 있습니다.
두 분의 일상 속에 일어나는 상실을 지켜보면서, 독자인 저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편지가 도움이 될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경험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랑 : 이가라시 상이 편지에서 ‘그나저나 이랑 씨는 참 많은 일을 겪네요.’라고 할 정도로 저에게는 이상하게도(?)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일을 단 한 사람에게 편지로 정리해 적으며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쓰는 일기와는 또 다른 위로의 감각이었습니다. 최근(2021년 12월 10일) 친언니가 사망한 뒤, 이가라시 상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가라시 상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저에게 ‘생명연장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생각을 더욱더 깊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라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저도 이제는 일기를 쓰지 않아요. 그러나 일기가 그렇듯, 자신이 쓴 글은 최고의 읽을거리입니다. 아마 저는 이 책도 여러 번 다시 읽게 되겠죠.
영화 <벌새>를 보고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은 일본과 한국이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하셨다고 했는데요. <벌새>를 통해 일본과 한국의 1994년, 1995년을 겹쳐 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큰 사건과 두 공간이 동시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다가오는 느낌이랄까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다른 사회를 살아왔지만, 이건 정말 비슷하네 하고 공감을 느낀 부분이 있었나요?
이랑 : 저와 이가라시 상이 살고 있는 사회(한국, 일본)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사회. 소수가 부와 권력을 가지고 다수를 위협하고 지배하는 사회. 그 외의 가치에 대해 그다지 논의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희가 ‘무명’이나, ‘엑스트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도 지금 사회 모습에서 한계를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이랑 씨도 자신이 자라온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제가 자린 가정과도, 이 세상의 다른 가정들과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부모가 있고, 그 슬하에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연령까지는 부모의 말을 따릅니다.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도 있지만, 차별과 폭력을 학습하기도 하죠. 다양한 문제들이 바로 가정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을 함께 읽으며 ‘지금과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셨죠. 자본주의 사회의 신화를 함께 생각해보는 경험은 어땠나요?
이랑 : 한마디로 너무 즐거웠습니다. 평소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생각에 대해 가까운 친구들도 ‘또 이상한 소리 한다’고 가벼이 취급할 때가 많은데 이가라시 상과 ‘지금과 다른 세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함께 상상할 수 있어, 동지를 만난 것처럼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평소에 막연히 상상했던 ‘돈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땅에는 왜 주인이 있을까?’, ‘가치는 어떻게 정해질까’ 하는 질문들에 대해, 이가라시 상과 같은 책을 같은 시기에 읽고, 이상한 것들은 역시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한국은 일본보다 빠르게 디지털 화폐가 자리를 잡았죠. 저는 신용카드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는 아날로그 현금주의인데 ‘돈은 마치 굿즈 같아요’라고 말한 이랑 씨의 발언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굿즈로 물건을 사고 있었던 거야’ 하는 생각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워졌어요.
‘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대목들이 재밌었습니다. 이랑 작가님은 <신의 놀이>라는 앨범을 내셨고,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은 『I(아이)』를 통해 신의 주제를 다루셨죠.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현재 시점에서 신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이랑 : 저는 신이 된다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꿈도 희망도 슬픔도 고통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그리고 나서 신인 제 자신도 없애버리고 싶네요. 신이라서 결국 ‘무(無)’가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유(有)’인 채로 무한함 속에서 가만히 있을 겁니다. 그게 신의 업보라고 생각하면서요.
이가라시 미키오 : 이랑 씨의 말처럼 모든 걸 무(無)로 만드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저는 국가든, 회사든, 가족이든, 권력으로 향하는 욕망을 없애보고 싶습니다. 그런 욕망이 없어진 인간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한번 보고 싶어요.
전염병 시대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요즘이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된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큰 질문이지만, 코로나19를 경험한 이후 재난 시대에 우리에게는 어떤 것이 중요해질지 두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랑 :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지 더욱 공고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결코 사랑이 최우선이 아닌 사회라는 것을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고통이 너무 큽니다.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안부를 전하고, 감염병 시대에 더욱 고립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특정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올해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한 저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쉬죠. 그런 생활이 재미있냐고요? 매우 편합니다. 편한 생활은 의외로 즐겁더군요. 즐거움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방식도 한 번쯤 시도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랑 1986년 서울 출생. ‘한 가지만 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가수이자 작가, 영상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청소년기에 미술학원을 열심히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생활 중 취미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해 결국 영화와 음악, 그림 그리는 일을 전부 직업으로 삼고 있다. *이가라시 미키오 책과 영화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보노보노』의 작가이며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이자 영화 제작자입니다. 출판물과 애니메이션 작업을 활발하게 이어 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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