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짓는 사람] 고운 결이 있는 동네로 이사 온 마음 - 이나래 브.레드 대표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월호
이나래 대표는 낙관적인 출판인이다. 성공과 실패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는 마음은 브.레드가 지향하는 ‘요란하지 않으면서 문득 꺼내 보고 싶은 책’과 닮아 있었다. (2021.12.28)
브.레드(B.read)라는 출판사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분명히 대표는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예상했다. 큰 오해였다. 왜 read(읽다) 앞에 ‘B’를 붙였을까? 물음표를 던져보니 ‘Book’이라는 단어가 금세 떠올랐다. 이나래 브.레드 대표는 출판사 이름을 고민하던 시절, 한 네이미스트 필자와 네이밍에 관한 책을 기획하고 있었다. 책의 얼개를 정리해 미팅하는 자리, 필자가 쓴 원고에서 ‘Brand Read’를 ‘B.read’로 표현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나래 대표의 눈에는 ‘Book Read’로 읽혔다.
“브.레드가 빵으로 읽히는 것도 제가 생각한 출판사의 방향성과 맞아 더할 나위가 없었어요. 브.레드의 지향을 빵에 비유하면, 디저트가 아니라 식빵이나 캉파뉴 등 밥이 되는 식사용 빵이라 할 수 있는데요. 프랑스에서는 철학책이 빵처럼 팔린다는 말을 떠올리며 빵처럼 팔리는 책을 만드는 소망을 더했어요.”
2018년 첫 책 『희망퇴사』를 시작으로 열일곱 권의 책을 펴낸 브.레드는 생활, 미식, 공간, 환경, 여가 등 개인의 일상을 살피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든다. 에세이, 인문, 요리, 살림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브.레드만의 속도로 만든다.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책을 좋아해요. 마치 역사 시간에 선생님이 어떤 사건에서 시작해 주변 스토리와 거기 나오는 어떤 용어에서 또 가지치기해 탐험하듯 들려주는 수업처럼 말이죠. 브.레드의 세 번째 책 『나무의 시간』은 만들면서 정말 흥미로웠어요. 줄기에서 곁가지로 뻗는 ‘거리’들이 교양의 바다를 이룬다고 할까요? 이런 책은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하면서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만들었어요.(웃음)”
당시 이나래 대표는 마케터 없이 혼자 책을 만들고 팔았다. 『나무의 시간』의 편집을 90% 정도 마친 시점에 일면식도 없는 인터넷 서점 MD에게 전화를 걸어 책 광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담당 MD는 당황하지 않고 광고 대신 프로모션을 제안했고 『나무의 시간』은 브.레드의 대표작이자 스테디셀러가 됐다.
“지금도 고마워요. 당시 브.레드 이름으로 책이 두 권 있을 때였으니 이 작고 이력 없는 출판사가 광고를 하긴 어려울 거라는 사실을 단번에 아신 거죠. 신생 출판사의 작고 큰 고민을 정말 친절하게 응대해주셨어요. 이후에도 출판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책 만드는 사람들의 고운 결을 느껴 이 동네에 이사 온 것이 다행이다 싶어요.”
이나래 대표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잡지사에서 14년간 기자로 일했다. 월간지의 매력은 트렌드를 앞서가는 일인데 연차가 쌓일수록 이 속도감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좋아하는 일과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니 사내 단행본팀에서 책을 만들던 경험이 떠올랐다.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후배가 말하길 제가 철야 마감 때 몽롱한 눈을 하고 '나는 책을 만들 거야'라고 했대요.(웃음) 잡지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한다고 했을 때, 98%의 주변인들이 그건 사양사업이라고 말렸어요. 하지만 호기롭게 말했어요. 다 안 하면 나만 남아서 하면 된다고요.(웃음)”
출판계에 들어오니 책을 만드는 진지한 태도와 찬찬한 흐름이 좋았다. 시선을 끄는 문장과 제목을 뽑는 일은 이미 훈련된 상태. 오랫동안 인터뷰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저자들을 찾았다. 책을 펴내는 기준은 ‘다시 꺼내볼 만한 책인가’, 그리고 ‘세상에 이로운 책인가’이다.
“사유할 수 있는 계기, 사고의 환기를 줄 수 있는 책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해요. 저는 책이 광고가 아니라서 좋아요. 소비자를 호도하거나 매혹적으로 과장해 팔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혹하게 하고 내용이 부실하면 독자들이 알아챈다는 점도 좋아요. 예전에 한 독자 리뷰를 읽었는데, 책을 만들면서 아쉬웠던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셨더라고요. 부끄러우면서도 힘이 됐어요.”
좋은 원고를 읽을 때 가장 행복하고, 인쇄소에서 완성된 책이 올 때 가장 불안하고, 책을 손에 잡는 순간 짜릿하면서도 아차 싶다. 편집자로서 가장 갖고 싶은 소양은 균형 감각. 책을 만들 때면 여전히 저작물과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라서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잡지기자 시절 좋은 인터뷰이를 만나고 오면 얼굴 가득 열기와 웃음을 띠고 들어와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멋있는지 한참 떠들곤 해서 선배들이 “쟤 또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웃음) 책을 편집할 때도 내용에 푹 빠져서 독자에게 무엇을 소구해야 하는지 길을 잃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꼭 마지막에 마케터와 카피, 뒤표지 문구, 핵심 셀링 포인트를 함께 뽑아요.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죠.”
출판사를 운영하며 떨릴 때는 은유 작가의 인터뷰집 『출판하는 마음』을 읽고, 중첩이나 명료성 등을 점검해야 할 때는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를 본다. 『한국문학통사』는 대학 시절 좋아했던 전공 책인데 브.레드의 모든 책을 만들 때 참고한다. 심지어 요리책을 만들 때도.
“『출판하는 마음』에는 편집자뿐만 아니라 제작자, 마케터, MD 등 다양한 출판 실무와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의 다채로운 시각이 들어 있잖아요. 출판 일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 이 책을 읽고 큰 도움을 받았어요. 특히 콘텐츠에만 꽂혀서 ‘이 책은 분명히 잘될 거야’라고 외치던 제게 마케터의 이야기는 정말 필요한 내용이었어요. ‘될 만한 책은 서점에서 먼저 띄운다’는 이야기도 초보 출판인에게 용기를 주었어요.”
이나래 대표에게 좋아하는 출판사를 묻자 대답이 술술 나왔다. “열린책들의 표지와 웨일북의 제목, 유유의 기획력, 후마니타스의 주제와 열화당의 강물 같은 흐름”을 사랑한다고. 브.레드의 서가 한구석에는 이나래 대표가 독자로서 출판인으로서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이 가득 쌓여 있었다.
“지금까지 브.레드에서 낸 책들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라이프스타일’이 될 수 있어요. 흔히들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하면 인테리어, 요리 등을 떠올리는데 저는 삶이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밥도 먹어야 하지만 지식 활동도 해야 하고 소설도 읽고 때로는 철학 공부도 해야 하고 취미 활동도 하잖아요. 다양한 인간의 삶에서 있어야 하는 많은 걸 브.레드의 결로 만들고 싶어요. 하나의 분야를 잡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지만, 저는 그냥 삶이라는 관점에서 폭넓게 책을 만들고 싶어요.”
이나래 대표는 편집자, MD 경력이 있는 마케터 한 명과 브.레드를 이끌고 있다. 두 명이 꾸리는 작은 규모의 출판사지만 “브.레드, 망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지인들로부터 든든한 지원사격을 받고 있다. 디자이너, 인쇄소, 교정교열자, 저자가 한 몸이 되어 브.레드를 응원한다.
“출판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종은 아니지만 보람은 정말 커요.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누가 출판사를 열고 싶다고 물어보면 저는 해보라고 말해요. 물론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면 굳이 이 일 말고도 많으니까, 왜 출판사를 하고 싶은지는 냉정하게 고민해보라고 하죠. ‘책 한 권 만들어봐야지’가 아니라 적어도 서너 권의 출간 리스트를 확보하고 시작해야 하고요. 나머지 실무는 부딪히고 경험하면서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2017년 출판사를 열었을 때는 기획이 매일같이 쏟아졌다. 몇 달을 고민하다 보면 과연 책으로 묶일 만한 이야기인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며칠 전 외서를 계약하면서도 ‘시간이 흘러도 읽힐 만한 책인가’를 두고 고심했다. 언제나 만들고 싶은 책은 두고두고 볼 수 있고 보고 싶은 책. 요즘 이나래 대표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잘 살아야 할까’, 그리고 이 질문에 도움이 되는 책을 만드는 일이다.
“아직 브.레드가 어떤 궤도에 올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매월 얼마를 반드시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고민으로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일단 저희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면서 경험이 쌓이면 출판 시장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길 거라고 믿어요. 큰 출판사처럼 마케팅을 못하지만 우리는 몇 권의 책에 더 정성스럽게 집중하니까요. 저자의 캐릭터와 콘텐츠를 섬세하게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을 더 키워나가야겠죠.”
이나래 대표는 낙관적인 출판인이다. 성공과 실패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는 마음은 브.레드가 지향하는 ‘요란하지 않으면서 문득 꺼내 보고 싶은 책’과 닮아 있었다.
정성갑 지음 | 브.레드
이 척박한 부동산 시대에, 경제적 관점이 아닌 공간과 시간의 매개로써 집의 이야기는 우리를 풍요롭게 할 거라는 기대였다. 이를 경험한 저자의 삶이 그러했으므로. 이 책을 만들 때 최대 난관은 글의 흡입력과 재미 때문에 편집자도 교정자도 정신줄을 잃고 이야기에 빠져 본분을 수없이 잃었다는 것. 한번 잡으면 내려놓을 수 없다. 아직도 나를 웃겼던 문장이 머릿속에 또렷하다.
오렐리아 블랑 저 / 허원 역 | 브.레드
샘플 번역본을 보고 브.레드의 냉정한 마케터가 두 팔 벌려 환영한 책이라 표지 디자인도 그래픽 스튜디오에 맡기고, 굿즈도 만들며 애정을 쏟았다. 디자인팀에서 준 1차 표지를 편집부가 반대했고, 수정안으로 표지를 결정한 어느 저녁, 디자인 실장님이 고민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다시 생각해도 1안이 이러이러한 이유로 맞는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힘 있고 매력적인 지금의 표지로 세상에 나왔다.
김민식 지음 | 브.레드
2년 전 식목일에 출간한 책인데 지금까지 신문, 방송, 서점, 기업체, 학교 등에서 연락이 끊이지 않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전체 글을 꼭지별로 프린트해 읽고 또 읽으며 파트를 나누고 순서를 짜는 데 꽤 시간을 들였다. 조사까지 예민하게 살피던 저자의 글은 문학적이기도 해서, 그 운율을 살려 파트 제목을 뽑았다. 지난하고 괴로운 시간이 뿌듯함이 되었던 추억이 있다.
정위, 이나래 저 | 브.레드
내가 쓰고 만든 첫 책. 전 직장에서 출간한 책을 노석미 작가의 그림으로 표지를 하고 글과 디자인을 매만져 개정판을 냈다. 부끄럽고 두려워 한 번 써낸 원고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 권유에 밀려 구고를 들쳤다. 그런데 10년 가까이 된 정위 스님의 이야기는 여전히 고요한 울림이 있었다. 곁에 두고 문득 다시 본다는 독자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것.
*이나래 월간지 <레몬트리>, <헤렌>에서 라이프스타일 기자로 14년간 일했고, 『친정엄마네 레시피』, 『바다와 섬의 만찬』, 『그저 그런 날에, 특별한 식탁』 등 음식 관련 책을 여러 권 만들었다. 20대시절부터 살림에 관심이 많아 옷 대신 그릇을 샀으며, 글로 읽은 레시피로 치면 손꼽히는 ‘레시피 다독가’이나 요리는 썩 잘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28개월 동안 정위 스님 옆에 서서 별별 질문을 하며 간 맞추는 법칙과 재료 고유의 맛 살리기 등 음식의 기본기를 익혔다. 그 세월 끝에 고기 없이도 감칠맛 나는 국과 반찬 몇 가지를 너끈히 만들 수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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