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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아워> 친구를 통해 비로소 나로 존재하는 시간
영화가 만들어내는 마법의 시간
즉흥 연기 워크숍을 통해 발굴한 4명의 배우로 <해피 아워>를 만든 것처럼 하마구치 류스케는 도전적인 시도로 마법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연출자다. 그야말로 거장이다. (2021.12.09)
상영 시간이 무려 5시간 17분이다. 몇 부작으로 이뤄진 드라마 아니고 한 편의 영화다. 그렇다면 ‘시간’이 미장센의 역할을 하는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해피 아워>(2016)의 제목에도 시간이 들어간다. 영화의 시작만 해도 30대 후반의 네 친구가 고베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정상의 공공 테이블에서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며 수다를 떠는 등 ‘행복한 시간 Happy Hour’을 보내는 듯하다.
아카리(다나카 사치에)와 사쿠라코(기쿠치 하즈키)와 후미(미하라 마이코)와 준(가와무라 리라)은 주말이나 휴일이면 모여 회포를 푸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수간호사로 근무하는 아카리는 이혼 후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사쿠라코는 중학생 아들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별로 없다. 큐레이터로 일하는 후미는 직장 생활에 충실하면서 편집자 남편과도 큰 문제 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사쿠라코와 후미처럼 기혼자인 준은 자신의 외도로 1년 넘게 남편과 이혼 소송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의 고베 언덕 소풍까지도 친구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때 준은 햇빛 찬란한 날을 기대했는데 안개가 잔뜩 낀 하늘을 보며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아카리와 사쿠라코와 후미는 준을 걱정하면서도 준의 고백을 계기로 자신들이 처한 결혼과 이혼 문제를 대면하게 된다.
준의 이혼 소송 고백 전까지 세 친구는 나름대로 생활의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 생각했다. 영화는 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의미 부여하기를 ‘한 발로 선 의자’에 비유한다. 후미가 기획한 워크숍의 강사로 나선 이의 특기는 의자 세우기다. 다리 하나에 중심을 의지한 채 정육면체 형태로 선 의자가 신기하면서도 가벼운 움직임에도 금방 쓰러질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아카리와 사쿠라코와 후미도 하나 같이 남편과 문제가 있(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건데 어느 시점부터 사랑해서 사는 건지, 관성처럼 붙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결혼 생활의 무게 중심이 사라졌다. 그걸 인지한 아카리는 이혼했다. 사쿠라코는 준의 고백을 계기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다시금 바라본다. 후미 또한 그렇다. 같은 예술 계통에 종사하는 남편이라 말이 잘 통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정말로 해야 할 대화는 회피해 왔다.
그게 꼭 네 친구에게만 유효한 현실일까. 우리 삶 또한 겉보기엔 큰 문제 없어 보여도 지탱하는 생활의 중심 무게가 아슬아슬한 탓에 곧잘 무너지고는 한다. 그건 가족이 지닌 속성에서 기인한다.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서 신뢰를 기반으로 내가 가진 모든 걸 보이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꺼리고, 피하고, 감추는 부분이 쌓이면서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어서다.
사쿠라코의 시어머니는 중학생 손자가 여자 친구와 사귀며 곤란한 일을 겪자 이런 얘기를 건넨다.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게 참 힘든 일이구나.” 사랑은 타인을 향하는 마음이자 내 감정을 이기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어서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갖는다. 준의 외도는 그 자체로 윤리에 어긋나지만, 소원했던 남편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수긍이 가는 것처럼 사랑은 어느 한쪽의 입장만 가지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영역이다.
정의하기 힘든 감정은, 특히 사랑은 구구절절 설명한다고 해서 명료해지는 것도 아니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라 개인의 입장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결혼과 이혼 같은 두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관계는 타인이 나서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대신, 당사자의 사연과 입장을 오랜 시간을 들여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는 의미가 있다.
아카리와 사쿠라코와 후미와 준에게 친구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대상에 가깝다. 이들은 친구를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다고 고민이 해결되거나 고통이 경감하는 건 아니어도 내가 처한 입장과 사연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편과의 사이에서, 가족 안에서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은 듯한 잠시간의 희열을 느낀다.
<해피 아워>는 네 친구의 삶을 엿본다기 보다 이들의 고민을 경청한다는 감각을 전달하는 영화다. 관련해, 후미의 편집자 남편이 작업한 작가의 신작 낭독회가 후반부에 등장한다. 단편 분량의 낭독회를 그대로 들려줄 뿐 아니라 이어지는 Q&A 시간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는다. 인상적인 건 작가의 낭독을 듣고 질문에도 참여하는 참가자들의 반응이다. 이는 꼭 아카리와 사쿠라코와 후미와 준의 사연을 5시간 17분 동안 집중해 듣는 관객의 거울상 같다.
그렇다면 관객은 <해피 아워>를 관람하는 동안 주인공의 친구로 체험하는 시간을 갖는 셈이다. 어떤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면서 극 중 친구들에게 감정이입하여 자신의 고민을 마음속으로 고백할 수도 있을 듯하다. 과거를 털어놓아 힘든 현재를 위안 받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 5시간 17분의 상영 시간이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친구들과 보낸 시간을 마음의 버팀목 삼으면서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해피 아워’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해피 아워>를 연출한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에 관심 있는 팬이라면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국내 개봉이 예정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원작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우연과 상상>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수상 내역이 아니어도 즉흥 연기 워크숍을 통해 발굴한 4명의 배우로 <해피 아워>를 만든 것처럼 하마구치 류스케는 도전적인 시도로 마법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연출자다. 그야말로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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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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